정세변화의 동향과 진보정당의 당면임무

한호석
민주노동당 미국동부위원회 위원장

 

<차례>
1. 위기의 근원
2. 국가권력의 이동
3. 사회계급관계에서 일어난 현상들
4. 흔들리는 신식민주의체제
5. 정체와 도약의 갈림길에서

1. 위기의 근원

역사가의 연구주제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과거사의 갈피에 묻혀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 자본주의시장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위기의 근원으로 되었다. 아시아에서 중국과 베트남이, 유럽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나라들이 사회주의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이른바 과도경제체제(transition economic system)로 넘어갔을 때, 시장확장에 혈안이 된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안겨주었다.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짐으로써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시장지배력은 명실공히 세계적 범위로 확대될 수 있었고 제국주의세계체제가 완성될 수 있었다.

주식시장과 증권시장은 투기열병에 걸렸고, 붉은 기를 내린 중국과 베트남, 러시아와 동유럽 나라들의 기업들에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투자광풍이 불었다. 투자와 생산, 차관과 대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달러와 상품과 신용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시장확장이 과잉투자, 과잉생산, 과잉신용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투자, 생산, 신용에서 과잉현상이 일어난 것을 흔히 거품경제(bubble economy)라 한다.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 한껏 부풀어올랐던 '거품'이 임계점에 이르러 꺼져버리는 바람에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주도하는 투자, 생산, 신용이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시장기능마비현상이 일어났다. 파국이 임박하였을 때 느끼는 공포가 제국주의독점자본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경제성장률 급락으로 난국에 빠진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서둘러 취한 위기탈출전략은, 신자유주의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중진국 시장경제에 대한 이윤수탈을 집중화,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1990년대에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시장확장열풍에 편승하여 고도성장에 이른 동아시아 중진국들이 집중수탈목표로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일차적으로 선정된 수탈대상이 1980년대에 '한강의 기적', 1990년대에 '아시아의 용'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대한민국'이다.

그처럼 일차적 수탈목표로 선정된 까닭은, 이 땅의 경제체제가 홍콩, 대만, 싱가포르 같은 다른 동아시아 중진국들과 달리 '한미동맹체제'에 의거하여 성립한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이므로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손쉽게 대량수탈을 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때로부터 오늘까지 10년 동안 이 땅의 신식민주의시장경제가 위기의 악순환에 빠져들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민생파탄의 고통을 떠넘긴 것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신식민주의시장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대량수탈을 자행해오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대량수탈은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예속심화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지배하고 수탈하는 신식민주의시장경제에서는 세계기준(global standard)에 맞게 국제경쟁력(international competitiveness)을 가진 대자본만 살아남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식민주의예속자본의 국제경쟁력 획득이란 신자유주의개혁개방요구에 굴복하는 기생(parasitism)이다.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경제성장은 곧 대자본의 기생화이다. 대자본의 기생화를 기업구조조정(corporate restructuring)이라 한다.

신식민주의기생자본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강도를 더욱 높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대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악순환됨으로써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착취강도가 높아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고통과 불행을 들씌우는 민생파탄의 원인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민생이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만, 정반대로 경제가 성장할수록 민생파탄이 전면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언론시장을 넘나들면서 말과 글을 팔아먹는 지식인들이 '고용 없는 성장' 또는 '분배 없는 성장'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이 땅의 경제현실이 그렇다.

이 땅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투자확대, 생산증대, 신용확장이 소수 지배계급의 소득과 소비를 무한정으로 팽창시키고 절대다수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는 빈곤과 궁핍을 강제하는 변태적 현상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반화되었다. 실질임금 하락과 물가폭등,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대는 신식민주의기생자본의 고강도 착취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윤수탈이 가중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2. 국가권력의 이동

위기가 심각할수록 현실변화는 급진적으로 된다. 세계적 범위에서 심화된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위기는, 세계적 범위에서 국가권력이 이동하는 정치적 변화를 일으켰다. 국가권력의 이동은 아래와 같이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

제국주의반동정권과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비핵화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반동적 정치이념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며, 신자유주의를 실현하는 반동적 정책기조가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보호주의고립화를 주장하는 흐름은 차단되었고, 신자유주의세계화에 따라오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낙오될 수밖에 없었다. '네오컨'이라고 부르는 신자유주의광신자들에게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넘어간 2001년의 국가권력이동은 그렇게 하여 일어난 것이다.

신자유주의광신자들이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을 장악하자 신자유주의세계화정책은 더욱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기업구조조정과 투자확대를 동원한 이윤수탈에 그치지 않고, 강제와 폭력을 휘두르며 야만적인 자원약탈에 나섰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침략전쟁과 정권교체라는 피비린내 나는 재앙이 일어난 원인이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야만적인 자원약탈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중동에서 국가권력의 이동은 침략전쟁으로 강제된 것이었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약탈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제국주의반동정권을 장악한 신자유주의광신자들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정권교체는 예상하지 못한 강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파탄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세계적 범위에서 일어난 저항은 아래와 같다.

2-1)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근본주의 저항세력이 제국주의점령군에게 폭탄테러반격을 퍼부으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점령군을 증파하여 군사적 패배를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전황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바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반이스라엘 영토회복을 기치로 내건 하마스가 집권하였으며, 이란은 반제군사전선을 강화하면서 역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2-2) 제국주의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신식민주의무역협정을 저지하는 대중투쟁이 전개되었다. 미국 시애틀(1999년), 멕시코 칸쿤(2003년), 중국 홍콩(2005년)에서 전개된 세계무역기구(WTO) 반대투쟁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점령군 철군을 요구하는 반전평화운동과 신식민주의무역협정을 저지하는 대중투쟁이 벌어졌다. 그러한 진보정치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영국, 이탈리아, 호주, 스페인에서는 전쟁중독증에 걸린 워싱턴의 신자유주의광신자들을 추종하면서 이라크침략전쟁에 파병하였던 신보수주의정당이 집권연장에 실패하고 사회민주주의정당이 집권하였다. 일본에서는 워싱턴의 신자유주의광신자들을 추종한 고이즈미가 물러났고, 미국의 2008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신자유주의광신자들이 패하고 민주당 후보가 백악관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 유럽연합, 일본에서 일어나는 국가권력의 이동은 신자유주의광신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몰락이다.

2-3)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하는 민주주의혁명의 물결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에꾸아돌, 니까라과에서 집권한 진보정당들은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제헌의회를 출범시킬 뿐 아니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를 단일공동체로 통합하는 이중전략을 수행하면서 민주주의혁명을 힘있게 밀고 나가는 중이다. 멕시코에서는 2006년 7월 대선에서 0.58% 포인트(24만3천 표) 차이로 낙선한 민주혁명당(Partido de la Revolucion Democratica, PRD)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뻬즈 오브라돌(Andres Manuel Lopez Obrador)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저항정부(Government in Resistance)를 세우고 투쟁하는 중이다.

제헌의회 출범은 국내 수구반동세력을 제압하는 계급투쟁이며, 남미공동체 통합은 제국주의수탈거점을 제거하는 반제투쟁이다. 민주주의혁명에서 계급투쟁과 반제투쟁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헌의회에서 제정하는 새로운 헌법이 민주주의혁명강령의 법적 표현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제국주의언론재벌이 장악한 씨엔엔(CNN)과 비비씨(BBC)에 대항하기 위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독자적인 위성텔레비전방송(Telesur)이 송출을 시작하였으며, 제국주의금융자본이 장악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하여 남미은행(Banco del Sur)이 출범하였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역내에 공급하는 남미에너지기구 창설을 다그치고 있다.

3. 사회계급관계에서 일어난 현상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미동맹체제'를 강화해온 과정은 이 땅의 역대정권들이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앞세운 제국주의지배정책에 순종해온 과정이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30여 년 동안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추진한 자본주의공업화의 과정은 신식민주의기생자본을 육성하고 성장시킨 과정이었다. 1997년 11월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신식민주의시장경제가 붕괴위기에 빠졌을 때, 이 땅의 정권과 자본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개혁개방요구와 이윤수탈을 막아내려 하기는커녕 그것을 '성장과 도약의 기회'로 미화, 분식하였다. 김대중의 대선승리로 처음 등장하여 노무현의 대선승리로 집권연장에 성공하였던 이 땅의 중도우파정권은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위기에서 벗어보려고 신자유주의개혁개방요구에 굴복하였으나, 개혁개방이 경제회생효과를 가져오기는커녕 대기업의 기생화가 촉진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생파탄을 겪게 되었다. 더욱 궁지에 몰린 중도우파정권은 신식민주의무역협정 체결을 합의하고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함으로써 위기를 넘어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식민주의기생자본의 고강도 착취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윤수탈을 가중시키는 미증유의 재앙이다. 이 땅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식민주의기생자본의 고강도 착취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윤수탈이 가장 심하게 가중되는 지역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위기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민생파탄이 재앙적으로 악화되면 사회계급관계에서는 아래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3-1)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중진국에서는 도시중산층이 정치적으로 진출하고 그에 따라 초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만,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위기는 그 계층의 정치적 진출에 급제동을 건다. 도시중산층의 정치적 진출에 한껏 고무를 받았던 중도우파세력이 분산, 약화되는 반면, 수구우파세력이 반사이익을 얻게 되고, 진보변혁세력의 정치적 진출은 정체와 도약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2007년 대선이다.

수구우파후보(이명박, 이회창)의 득표율은 63.8%(1천505만2천352명)이었고, 중도우파후보(정동영, 문국현)의 득표율은 31.9%(755만179명)이었으며, 민주노동당 후보(권영길)의 득표율은 3%(71만2천121명)이었다. 2002년 대선의 득표율과 비교하면, 수구우파후보의 득표율은 17.2% 포인트 늘어났고, 중도우파후보의 득표율은 17% 포인트 줄었으며, 민주노동당 후보의 득표율은 0.9% 포인트 줄었다.

17%에 이르는 부동층이 중도우파후보에게 등을 돌리고 수구우파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17%에 이르는 부동층이 중도우파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면, 중도우파정권은 근소한 표차로 집권연장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 부동층은 2002년 대선에서 중도우파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도시중산층이며, '한겨레' 2007년 12월 4일자의 표현을 빌리면, 수도권의 40대 유권자들이다.

비혁명적 상황에서 사회계급관계가 변화하는 속도는 매우 느리므로, 사회계급관계를 반영한 정치세력판도는 거의 고정적이다. 이명박의 대선승리는 정치세력판도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신식민주의시장경제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보면서 불안해진 도시중산층의 표심이 일으킨 정치적 변화이다. 2007년 대선에서 그 계층의 정치적 선택은 중도우파세력을 위축시켰다.

2007년 대선결과는 또한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이 정체되었음을 보여주었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선택하였던 고정지지자들만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다시 표를 주었으므로,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지지표를 얻는데 실패한 것이다. 사회변혁을 향하여 계속 전진해야 할 진보정당이 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하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3-2)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위기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민생파탄이 악화될 때, 사회계급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탈정치화 만연과 생존권사수투쟁 확산이다.

2002년 대선의 투표율은 70.8%로 사상최저를 기록하였는데, 2007년 대선의 투표율 63.0%는 다섯 해 전의 최저기록을 또 갱신하였다. 2007년 대선에서 선거불참자는 1천392만664명이나 되니, 이명박 투표자와 선거불참자의 수가 비슷한 것이다. 선거 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경북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63%는 선거일이 어느 날인지 알지도 못하였다. 정세변화에 가장 민감한 사회계층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준비에만 몰두하는 오늘의 현실은 이 땅에 탈정치화가 얼마나 만연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개인의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두게 만들고, 정치적 불신과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탈정치화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탈정치화 현상은 그들 속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해야 하는 민주노동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된다. 탈정치화 현상이 만연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전략을 지난 다섯 해 동안 개발하지 못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빠진 정체위기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사수투쟁을 확산시킨다. 자본주의언론시장은 그 투쟁을 외면하거나 '불법시위', '폭력사태'라고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지만, 그 투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숨통을 조이는 고강도 착취와 대량수탈에 저항하는 절박한 투쟁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서 자기의 존립근거를 찾고, 그들의 투쟁에서 성장동력을 공급받는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사수투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논제는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사수투쟁은 자연발생적으로,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그 투쟁이 확산되어도 좀처럼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투쟁이 민주노동당의 정치투쟁과 만날 때 비로소 승리의 진격로를 열어놓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사수투쟁에 결합하여 싸워왔으나 2007년 대선결과는 그 결합도가 아직 낮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확산되는 생존권사수투쟁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전략을 지난 다섯 해 동안 개발하지 못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빠진 정체위기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4. 흔들리는 신식민주의체제

6자회담 합의에 따르면, 2007년 연말까지 북측은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량을 통보하는 한편,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북측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007년 12월 둘째 주부터 미국 국무부가 파견한 실무단이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꺼내기 시작하였는데, 실무단 일곱 명은 2007년 연말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작업을 계속하였다. 일급 보안구역인 영변 핵시설을 적대국의 관리들에게 열어준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측이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량을 통보하는 것과 미국이 북측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는 것은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통보문제와 해제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으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은 고사하고, 6자 외무장관 회담도 열리지 않고 있다.

합의사항 이행이 늦어지는 까닭은, 부쉬정부가 북측에게 무기급 플루토늄의 용도를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무기급 플루토늄의 용도를 밝히라는 말은 핵탄두 보유량을 밝히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이 열리지 못하여 조미관계가 아직 적대관계에 있는데 적대국에게 핵탄두 보유량부터 밝히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북측이 핵탄두 보유량을 밝히면 핵탄두를 해체하는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현재 조미관계는 아직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북측이 핵탄두를 해체하는 것은 미국이 북측에 대한 제국주의적대정책을 포기하였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하였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북측의 핵탄두 해체와 미국의 적대정책 포기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이 먼저 선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쉬정부가 북측에게 핵탄두 보유량을 밝히라는 부당한 요구를 제기한 것에는 6자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속도를 늦추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부쉬정부의 정치적 의도는 2007년 대선정국에서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경우, 그 동안 평화체제 구축문제를 중시해온 중도우파정당의 대선후보에게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게 될 것이므로 그러한 조건을 피하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을 대선 전에 개시하여 대선에 영향을 주려고 하였던 노무현정부는 부쉬정부에게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을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개시할 것을 간청하였다. 2006년 11월초부터 외교통상부장관 송민순과 청와대 안보실장 백종천이 번갈아 워싱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러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쉬정부는 그들의 간청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을 뒤집어보면, 부쉬정부가 2007년 대선에서 수구우파정당의 후보를 지지하였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부쉬정부가 합의이행속도를 늦추는 전술을 취하였으나, 그러한 지연전술의 효과는 처음부터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핵탄두 보유량을 밝히는 문제와 관련하여 북측이 부쉬정부와 타협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타협이 불가능한 조건에서는 합의 자체를 깨버리든지 아니면 합의이행을 재개하든지 어느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부쉬정부가 이제 와서 합의를 깨버리는 무모한 자해행위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합의이행은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8년 상반기 안에 부쉬정부는 북측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할 것이며, 2008년 8월 이전에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이 열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회담장소는 판문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전협정을 체결한 때로부터 꼭 55년만에, 정전협정을 체결한 곳에서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이 열리는 역사적 사변은, 정전체제가 무너지고 평화체제가 세워지는 시대적 변화를 뜻한다. 노무현정부의 표현을 빌리면, 전쟁종식과 평화체제 구축이 실현되는 것이다. 정전체제의 붕괴가 한(조선)반도 정세변화에 주는 두 가지 의미를 논할 필요가 있다.

4-1) 정전체제는 전쟁상태를 끝내지 않은 채 군사적으로 대치한 준전시상태에서 분단체제를 고착화하였으므로 정전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분단체제를 고착화한 결정적인 요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분단체제를 고착화한 결정적인 요인이 사라지는 것은,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유리한 조건이 생기는 것이다. 정전체제 붕괴가 평화체제 수립에서 멈추지 않고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예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4-2) 정전체제는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주한미국군을 장기적으로 주둔시키면서 북측에게 제국주의전쟁위협을 가해온 전쟁체제이므로 정전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주한미국군을 주둔시키고 제국주의전쟁위협을 가해온 결정적인 요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정전체제가 무너졌다고 해서 주한미국군을 즉각 철군하지는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전쟁위협이 완전히 해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전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제국주의전쟁위협을 해소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무력하게 된다는 점에서, 정전체제의 붕괴는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제국주의전쟁위협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전체제가 무너지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것은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이 땅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사라지는 것이며, 제국주의전쟁위협이 감소하는 것은 북측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의 군사적 지배는 이 땅의 신식민주의체제를 유지해온 근간이므로, 주한미국군 철군은 신식민주의체제의 근간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혁명에서 주한미국군 철군이 반제자주화강령의 전략목표로 설정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또한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침략전쟁위협은 북측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해왔으므로, 주한미국군 철군은 사회주의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반사회주의봉쇄전략이 파탄되는 것이다. 북측의 사회주의건설에서 주한미국군 철군이 반제자주화강령의 전략목표로 설정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위에서 논한 것을 정리하면, 2008년 여름에 판문점에서 열릴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의 진전에 따라 평화체제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평화통일강령과 반제자주화강령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반동정권과 추종세력은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한(조선)반도 평화회담이 진전되어 조미관계와 남북(북남)관계가 바뀌기 시작하면 북측이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들여가고 개혁개방에 발을 들여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조선)반도 전역의 자본주의시장경제화가 그들의 염원이며 지향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러한 염원과 지향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하는 근거를 중국-미국 관계정상화와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에서 찾았다. 아닌게 아니라 혁명의 붉은 기를 휘날리던 그 두 나라가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해온 과정은 사회주의자력갱생노선 포기, 개혁개방노선 채택, 자본주의시장경제 수용, 제국주의독점자본 진입허용,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점차적 소멸로 이어진 탈사회주의화의 과정이었다.

명백하게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사회주의나라에 들여가는 개혁개방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중요산업을 사유화하고 투자를 활성화함으로써 사회주의계획경제와 사회주의자력갱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경제통합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한(조선)반도의 자본주의경제통합은 자본주의국제분업과 제국주의수탈거점을 북측에까지 확장하는 비폭력적인 사회주의말살전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북측에는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주의선군정치가 있다. 사회주의선군정치는 대북혐오증에 걸린 선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군대가 무력으로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군부통치가 아니라, 혁명과 건설에서 앞장선 인민군대가 인민대중을 사회주의반제투쟁과 사회주의 자주적 발전의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사회주의강성대국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는 정치방식이다.

북측의 경제난을 과대평가하면서 사회주의강성대국 건설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정세의 흐름을 잘못 짚는 착오이다. 조미관계 정상화로 제국주의경제제재가 사라지고, 조일관계 정상화로 식민지피해배상 청구권 자금이 들어가고, 남북(북남)이 경제협력을 발전시켜 서해안 대륙붕에서 유전을 공동개발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는 대륙철도가 연결되어 조중경제협력과 조러경제협력이 활성화되면 북측의 사회주의경제건설은 고도성장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북측이 사회주의경제의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상설적 협의기구 창설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상설적 협의기구란, 남북(북남) 정부당국과 남북(북남)해외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전국적 정치협의기구이다. 상설적 협의기구를 창설하는 실천공약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발표된 '남북(북남)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반영되어 있다.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상설적 협의기구가 창설되고, 신식민주의시장경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반면에 사회주의계획경제가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신식민주의체제의 붕괴를 재촉하는 복합적 요인이다.

5. 정체와 도약의 갈림길에서

신식민주의체제가 위에서 논한 복합적 요인에 의해서 흔들리기 시작한 오늘의 전환기는, 진보정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민주노동당이 집권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백년만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정세변화의 흐름을 포착하고 당면과제에 총력을 집중할 때, 진보정치가 승리할 수 있고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다. 지금 정체와 도약의 갈림길에 선 민주노동당에게 예리한 정보분석과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낡은 관행과 고정관념을 깨고, 소수정파의 이익보다 민주주의혁명의 이익을 위하여 실천하려는 당활동가들과 열성당원들에게 민주노동당이 정체를 딛고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5-1) 전환계기와 반전계기

이명박정권은 민주노동당과 한국진보연대에 결집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강압적으로 차단하려고 할 것이다. 이명박정권은 노무현정권보다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압적 차단을 자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체와 도약의 갈림길에 선 민주노동당에게 이명박정권의 강압적 차단은 난관을 조성할 것이다.

2008년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정치역량을 발휘할 계기는 총선과 민중대회이다.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정체위기를 돌파하는 전환계기이고, 민중대회는 이명박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반전계기이다.

수도권 40대 유권자들로 이루어진 부동층의 표심은, 2007년 대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노동당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잠재적 표밭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농민들, 영세자영업자들, 도시빈민계층, 청년실업자들이다. 그들의 감성적 사고를 자극하는 맞춤형 총선전술이 요구된다. 선거국면에서 유권자의 표심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감성적 사고이다. 민주노동당의 잠재적 표밭을 사이비 진보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도 2007년 대선의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선거전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대회에서 승리하여 결정적인 반전계기를 잡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원내의석확보가 아니라 낡은 정권의 퇴출과 새로운 정권의 창출이므로, 민중대회는 정권퇴출투쟁을 밀고 나갈 전력을 강화하는데서 필수적이다. 민중대회의 승리만이 정권퇴출투쟁을 일으킬 수 있다. 민중대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주주의혁명과정에서 정권퇴출투쟁의 위력을 입증하였다.

평소에 꾸준히 노동계급의 생산현장과 근로대중의 생활현장을 누비는 당활동가들과 열성당원들이 민중대회를 승리로 이끄는 숨은 주역이다. 인터넷 선전은 수도권 40대로 구성된 유권자들이나 청년계층에게는 효과적이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는 제한적이다.

5-2) 결합력과 친밀도

당활동가들과 열성당원들이 평소에 꾸준히 노동계급의 생산현장과 근로대중의 생활현장을 누비는 것은, 민중대회에서 승리하여 반전계기를 잡는 전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이 땅의 유일한 진보정당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전략 그 자체이다.

민주노동당이 다른 당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노동계급과 결합하고 근로대중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과의 결합력과 친밀도를 끝없이 강화하여 그야말로 혈연적 관계를 맺게 될 때, 민주주의혁명의 위업은 완성될 것이다.

그러한 결합력과 친밀도는 중앙당에서 강조만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생산현장과 근로대중의 생활현장에 건설한 수많은 기층당조직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생산현장에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전략은 당의 정체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민주노총 산하 1천143개 조합 속에 수많은 기층당조직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한 개의 조합 안에 10개의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면 1만1천430개의 기층당조직이 생기게 된다. 기층당조직이 평균 10명의 당원으로 구성된다고 하면,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당원이 새로 생기는 것이다.

대만의 노조조직률은 37%인데 비하여, 이 땅의 노조조직률은 10.3%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 부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가장 열렬한 지지기반이 될 수 있는데, 85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조조직률은 겨우 1.9%이다. 노조의 불모지에 방치된 것 같은 그들 속에서 어떻게 기층당조직을 건설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5-3) 정권퇴출투쟁

2007년 11월 11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방방곡곡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집결하였던 민중총궐기는 민중대회의 승리적 전망을 보여준 장거였다. 정권과 자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민중대회이다. 그래서 진압경찰을 이중삼중으로 배치한 견고한 저지선을 치고 민중대회 참가를 막으려고 하였다. 민중대회에서 폭발하는 거대한 투쟁력을 잘 조직하면 얼마든지 정권퇴출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2007년 11월 민중총궐기는 승리적 전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과 이회창이 대표하는 수구우파세력이 무려 63.8%(1천505만2천352명)에 이르는 압도적 득표를 달성한 것과 2008년 총선일정이 임박한 것은, 정권퇴출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당분간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부동층 유권자들의 기대심리가 머무는 동안에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의 부정부패는, 특검수사를 한다고 해도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많고, 혹시 특검수사에 의해서 일부가 밝혀지더라도 정권퇴출투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되지 못한다.

민생파탄과 부정부패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폭발하여야 정권퇴출투쟁이 전개될 수 있다. 정권퇴출투쟁은 각계층 근로대중이 결집한 민중대회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망라한 수십만 명의 노동계급이 벌이는 총파업투쟁이 동시에 일어나야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대선열기에 묻혀있을 때, 그리스 노동계급과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총파업투쟁을 벌였다. 2007년 12월 11일 이탈리아 화물운송노조가 벌인 파업투쟁은 위력적이었다. 파업투쟁에는 이탈리아 화물트럭기사 80%가 참가하였다.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를 화물트럭으로 막아버리자 전국적 범위의 교통대란이 일어났고, 유류운송이 중단되자 전국 주유소의 80%가 마비되었으며, 식품운송이 중단되자 도시상점의 식품판매대가 텅 비고 말았다.

그 이튿날, 그리스 노동계급이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총파업투쟁으로 은행, 학교, 병원, 약국, 법원이 문을 닫고 대중교통, 텔레비전방송, 라디오방송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항공기와 선박의 발이 묶였다. 그리스정부는 전투경찰을 배치하여 총파업투쟁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피자 배달원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기세에 눌려버렸으며, 인민들은 파업투쟁대오가 아테네 중심가를 지날 때 박수와 환호로 그들의 투쟁을 지지, 성원하였다.

2007년 대선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노총 지도부가 노동계급의 이익을 저버리고 수구우파정당과 야합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사이가 벌어진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투쟁력만으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노동계급이 일으킨 위력적인 총파업투쟁을 전개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너무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문제를 푸는 열쇠는 민주노총의 단결력이다.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계급 속에서 비록 소수라고 해도 강한 단결력을 가진다면 소수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력적인 총파업투쟁을 벌일 수 있다. 단결력은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이 작용해야 생기는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계급의식 강화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조합원들이 정치교육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5-4) 양자구도와 삼자구도

수구우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은 신식민주의정권을 장악하려고 싸우는 두 종류의 경쟁적 정치세력이다. 그 두 정당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정계개편이라는 미명 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정당간판을 여러 개 내걸겠지만, 수구우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맞서는 양자구도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에 비해, 민주노동당은 낡고 부패한 신식민주의정권을 장악하려는 정당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는 정당이다. 민주노동당과 다른 정당을 갈라놓는 분기점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지점이다.

수구우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는 양자구도가 고착화되면,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신식민주의체제는 그 양당의 교차집권에 의해서 존립과 안정을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존의 양자구도를 깨고 새로운 정치지형을 조성하는 것이다. 중도우파정당이 무너지면 자연히 민주노동당 대 수구우파정당의 양자구도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중산층이 몰락해야 중도우파정당이 무너질 것인데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양자구도를 삼자구도로 개편하는 전략을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삼자구도는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대표체로, 중도우파정당이 도시중산층의 정치적 대표체로, 그리고 수구우파정당이 자본계급의 정치적 대표체로 각자의 계급적 성격을 명백하게 드러낼 때 정립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대표체로서 자기의 계급적 성격을 명백하게 드러낼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정치적 지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배격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을 갉아먹는 사이비 진보정당의 침식작용, 정파적 이익과 당의 이익을 서로 대치시킴으로써 민주노동당을 쪼개놓으려는 분당론, 그리고 민주노동당만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니 중도우파정당과 연대하여 집권하자는 민주연립정권론이다.

중도우파정당이 몰락하면, 그 정당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중산층은 분해되어 일부는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으로, 다른 일부는 수구우파정당의 지지기반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민주노동당 대 수구우파정당의 새로운 양자구도가 형성된다.

5-5) 의식혁신과 집권준비

진보는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는 돌진이 아니라 자기혁신의 전진이다. 생명체가 신진대사를 멈추는 순간 생명을 잃는 것처럼, 자기혁신이 없는 진보는 답보와 정체에 머물거나 퇴보함으로써 진보이기를 그만둔다. 계속전진과 자기혁신은 진보의 두 성질이다.

민주노동당에게 요구되는 자기혁신은 영원한 소수정당으로 남지 않기 위한 자기혁신이다. 민주노동당이 영원한 소수정당으로 남지 않으려면 자기혁신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자기혁신이란 자기의 의식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손과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는 위생활동을 계속하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은 자기에게 묻은 주관주의, 교조주의, 형식주의, 정파주의, 보신주의, 출세주의의 때를 씻어내는 사상의식의 위생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당원학습운동을 전개하고 당원교육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자기의식을 혁신하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착각 중의 착각이다.

민주노동당이 자기의식을 혁신해야, 당체계를 실정에 맞게 개편할 수 있으며 우리 현실에 맞는 집권전략도 개발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준비기간을 거쳐야 집권할 수 있다. 집권이란 정부기구를 운영하는 권한과 책임을 떠맡는다는 뜻이다. 집권능력이란 수없이 많은 층위와 회로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고 변화시키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고도의 능력이다. 정부기구 운영은 전문지식이 없는 애호가(amateur)들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외관계를 조절하는 외교전문가, 나라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전문가, 나라의 재정을 맡아보고 나라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경제전문가, 사법기관을 지휘할 법사전문가, 과학과 기술을 선진화하고, 교육과 보건,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길러내는 당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에서는 정부기구 운영에 요구되는 전문지식을 가진 당활동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간부양성은 집권을 준비하는 정당에게 필수적인 과제이다. 간부양성에 요구된다면 당활동가와 열성당원들에게 해외유학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진보변혁세력이 집권에 성공하였으나 정부기구를 운영할 인재가 없어서 정권퇴출과정에서 밀려난 부패하고 무능한 기술관료들을 다시 등용하는 바람에 결국 국정실패와 정권붕괴를 자초한 쓰라린 실패경험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낡은 정권의 퇴출만 준비하고 새로운 정권의 창출은 준비하지 못하면서 집권전략을 논하는 비좁은 안목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2007년 12월 21일 작성)

* 이 글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 2008년 1월 호에 기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