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정세의 발전과 진보정치세력의 임무

한호석
민주노동당 미국동부위원회 위원장

1. 비핵화의 범위는 3자를 포괄한다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9.19 공동성명) 제1항의 첫 문장은 이렇다. "6자는 6자회담의 목표가 한(조선)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하였다." 이 문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조선)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verifiabl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라는 개념이다. 그 개념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비핵화의 범위를 규정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9.19 공동성명에 따르면, 비핵화의 범위가 북측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조선)반도 전역으로 확대된다. 다시 말해서, 9.19 공동성명은 북측만이 아니라 남측도 비핵화의 범위에 들어가며, 주한미국군기지도 비핵화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점을 밝혀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북핵문제' 또는 '북한의 비핵화'라는 말을 쓰면서 비핵화의 범위를 북측으로 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반북친미성향에 기울어진 보수언론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주입받거나 영향을 받은 잘못된 시각을 뒤집어놓아야 정세를 보는 '정상시력'이 회복된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남, 북, 미 3자가 한(조선)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실현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약이행이고 다른 하나는 공약이행에 대한 검증이다.

2. 북측이 이행할 비핵화공약

북측이 이행할 비핵화 3대 공약은 핵계획 포기, 핵확산금지조약 및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 복귀, 그리고 핵무기 포기이다. 9.19 공동성명 제1항은 그 3대 공약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nuclear programs)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안에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고 규정하였다.

북측이 현 단계에서 비핵화 공약을 이행한 수준은, 3대 공약 가운데서 첫 번째 공약인 핵계획 포기공약을 절반쯤 이행한 것이다.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한 것이 그것이다.

앞으로 북측은 핵계획 포기공약의 나머지 절반까지 이행하고, 핵확산금지조약 및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에 복귀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공약을 하나씩 이행해갈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나서는 과제는 핵계획 포기공약의 나머지 절반을 이행하는 것인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측이 생산한 핵물질(무기급 플루토늄)을 처리하는 과제이다. 핵물질을 처리한다는 말은 미국이 그것을 자국으로 이전해놓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핵물질 이전이란 물건운반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북측이 미국에게 핵물질을 이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return service)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핵물질 이전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핵물질 이전이란 북측과 미국이 핵물질을 사고파는 무역행위가 아니므로, 핵물질 이전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는 당연히 정치적인 조치로 될 것이다. 미국이 내놓아야 할 정치적 반대급부는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측이 비핵화공약을 이행해가는 일련의 과정은, 북측이 핵탄두 보유수를 공개하는 과정, 북측이 핵탄두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과정, 미국이 포기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으로 전개될 것이다.

북측이 자기의 비핵화과정 맨끝에서 이행해야 할 가장 어려운 난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북측이 보유한 핵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핵무기 포기공약을 이행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그러했던 처럼 미국의 핵기술자들이 북측의 비밀핵무기고에 들어가서 핵탄두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북측이 스스로 핵탄두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9.19 공동성명을 작성할 때, 북측은 미국이 요구한 해체(dismantlement)라는 말을 넣지 않고 포기(abandonment)라는 말을 넣었다. 핵포기라는 말은 북측이 스스로 핵탄두를 폐기한다는 뜻이다.

3. 미국이 이행할 비핵화공약

북측의 비핵화공약 이행에 상응하여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이행할 비핵화공약은, 핵무기를 남측에 들여오지 않는 것과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측을 공격하거나 침공하지 않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 제1항은 그 2대 공약을 "미합중국은 한(조선)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규정하였다.

이 땅에 핵무기를 들여오지 않는다는 공약은, 주한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핵탄두를 실은 항공기, 함정, 잠수함, 미사일 또는 그밖의 핵관련 군사장비를 이 땅에 들여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군산공군기지에 들락거리는 미국공군 전폭기들, 부산항에 입항하는 미국해군 항공모함 전단, 진해항에 입항하는 미국해군 핵추진 잠수함, 평택기지에 들어오는 미국지상군 미사일장비는 한결같이 핵탄두 적재능력 또는 탑재능력을 지닌 것들이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이 규정한 비핵화강령에 따르면, 앞으로 미국이 그러한 군사장비들을 주한미국군기지에 들어가려면 거기에 핵탄두를 적재 또는 탑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미국이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측을 공격하거나 침공하지 않는다는 공약은, 미국의 핵우산 제공공약이 영구히 폐기된다는 뜻이며,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영구히 중지된다는 뜻이며, '작전계획 5027' 같은 북침전쟁준비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국이 북측에 대한 불가침공약을 이행하는 것이다.

미국이 핵우산 제공공약을 폐기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고 작전계획을 폐기하면, 핵우산 제공공약을 재확인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작전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서 열리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는 맥이 풀릴 것이다.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맥이 풀리면, 주한미국군을 주둔시킬 명분과 한미군사동맹을 유지할 명분이 희미해질 것이다.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무력화된 조건에서 평화회담이 개최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라는 강한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

4. 남측이 이행할 비핵화공약

남측이 이행할 비핵화 3대 공약은, 주한미국군의 핵무기 배치를 용인하지 않는 것, 남측 스스로 핵무기를 제조하여 배비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남측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 제1항은 그 3대 공약을 "대한민국은 1992년 한(조선)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 및 배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하고 자국 영토 안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규정하였다.

남측이 이행할 비핵화 3대 공약 가운데 첫 번째 공약은, 미국이 주한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비핵화공약에 연관된 것이다. 비핵화공약을 이행한 뒤에, 만일 미국이 주한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들여가면, 미국만이 아니라 남측도 비핵화공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된다.

앞으로 미국이 자기의 비핵화공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나서 주한미국군 철군을 시작하는 경우, 남측이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을 '심각한 안보위기'로 여기고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비핵화공약을 깨뜨리는 것이다.

5. 문제는 검증체계이다

남, 북, 미 3자가 각자 자기의 비핵화공약을 이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이행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다. 말로만 공약을 이행하였다고 하고 실제로는 이행하지 않는 공약 불이행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검증과정은 불가피하다. 공약이행에 대한 검증을 끝마칠 때, 비핵화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남, 북, 미 3자가 각자 상대의 비핵화공약을 검증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변이다. 다른 나라의 비핵화과정을 보면, 미국은 오만하게도 다른 나라의 비핵화공약 이행여부를 일방적으로 사찰하였다. 사실상 강제사찰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게는 비핵화를 요구하기는 하였으나, 상호비핵화나 상호검증을 용인한 경우는 없으며, 그러한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상호검증(mutual verification)과 강제사찰(compulsory inspection)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개념이다.

비핵화공약을 이행하는 단계에서 관련당사자들은 검증방식, 검증대상, 검증기간을 구체적으로 합의해야 한다. 검증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검증체계를 통해서 비핵화공약의 이행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핵포기는 북측이 스스로 핵탄두를 폐기하는 것이므로 폐기공정을 미국에게 공개할 필요가 없고, 공개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폐기여부를 검증하도록 허용할 것이다.

북측이 미국에게 핵탄두 폐기여부를 검증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북측이 최고의 군사비밀, 국가기밀을 미국에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북측과 미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최고의 군사비밀, 국가기밀을 정전상태에 있는 적국에게 공개하는 나라는 이 세상이 있을 수 없기에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핵무기 포기공약을 이행하는 것과 조미국교를 수립하는 것이 서로 탄탄하게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주한미국군기지들에서는 미국군 항공기, 함정, 잠수함, 미사일이 수없이 드나드는데, 그러한 군사장비들 가운데 상당수가 핵탄두 적재능력 또는 탑재능력을 지닌 것들이다. 그러므로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규정에 따르면, 북측은 주한미국군기지에 드나드는 각종 군사장비들의 핵탄두 적재여부 또는 탑재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주한미국군기지에 드나드는 각종 군사장비들의 핵탄두 적재여부 또는 탑재여부를 북측이 검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주한미국군기지의 비핵화공약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검증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방도는, 주한미국군기지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비핵화공약 이행이 미국군기지 폐쇄와 맞물려 있다는 말은,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을 전제하는 말이며, 철군과정을 통하여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세워지는 것을 뜻한다.  

6. 불귀점을 지난 비핵화과정

이와 같이 북측이 자기의 비핵화 3대 공약을 이행하고, 미국이 자기의 비핵화 2대 공약을 이행하고, 남측이 자기의 비핵화 3대 공약을 이행하면, 이 나라 삼천리강산은 지구 위에서 가장 안전한 비핵지대로 전변될 것이다. 남, 북, 미 3자가 9.19 공동성명에 명기된 자기의 비핵화공약을 이행할 때, 전쟁위험이 사라지고 참된 평화가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항구적인 평화체제는 비핵화강령이 이행되는 바탕 위에서 공고하게 세워질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라는 한 마디 짧은 말 속에 그처럼 거대한 변화의 의미가 들어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조선)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는 그것이 추진되는 도중에 톡톡 끊어지며 분절될 수 없도록 서로 탄탄히 맞물려놓은 일련의 과정이다. 9.19 공공성명과 2.13 초기조치 합의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맞물려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남, 북, 미 3자가 일단 비핵화과정에 들어서면 뒤로 돌아설 수도,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도, 멈출 수도 없게 된다. 비핵화과정에는 오직 완성목표를 향한 진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과장어법이 아니다. 핵문제가 가지는 속성이 비핵화과정을 그렇게 맞물려놓는 것이다. 핵은 어중간히 처리할 수 없고, 어물어물 처리해서도 안 되는 가장 예민하고, 절대적인 물질이다. 그래서 핵이라는 물질에 일단 손대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비핵화강령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이 땅의 정치정세는, 앞으로 예상치 못한 돌출변수와 우여곡절이 튀어나오겠지만 남, 북, 미 3자가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조심스럽게 즈려밟고 나아가는 중이다. 영변 핵단지 한 복판에 있는 냉각탑이 폭파되는 순간, 이 땅의 비핵화과정은 불귀점(point of no return)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7. 비핵화정세에 대응하는 진보정치세력

비핵화정세가 무르익을 때, 비핵화검증체계가 작동하게 된다. 지금은 비핵화검증체계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하였지만, 비핵화검증체계가 작동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비핵화정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조미 두 나라가 주도하게 될 비핵화검증을 남의 일을 바라보듯이 대할 것이 아니라, 비핵화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비핵화정세가 무르익을 때,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역할과 임무는, 비핵화강령을 선언이나 공약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비핵화를 지지하는 다른 정당과 손잡고 한(조선)반도 비핵화특별법 같은 법령을 제정하는 일에 민주노동당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확실한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하려면, 비핵화강령을 헌법에 앉히는 비핵화개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치세력들과 손잡고 비핵화개헌을 청원하는 대중운동을 벌이는 방안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핵화강령의 법제화와 대중화, 이것이 민주노동당이 비핵화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이다. (2008년 8월 2일 작성)

* 이 글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 2008년 8월호에 기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