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통합진보당 해산중단을 촉구하는 손팻말도 등장했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2001년 9월 22일에서 2012년 3월 8일까지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실현할 민중의 강력한 무기로서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 건설! 우리는 이것을 향후 2∼3년 안에 해내자고 결의한다.” 

당찬 인상을 안겨주는 이 문장은 누구의 글인가? 2001년 9월 22일 1박2일 일정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보람원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진행한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문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참석한 그 대회에서는 민족민주정당 건설→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2001년까지만 해도 ‘전국연합’은 진보정당이나 진보정치라는 개념을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앞으로 2∼3년 안에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때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전국연합’이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는 경우 진보정당이 두 개가 될 판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국연합’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4년에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여 그 당의 주도세력으로 되었고, 그 주도세력은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방침을 보완하여 진보정당 건설→진보적 정권교체→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제시하였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채택한 방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진보적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있고, 자주적 평화통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모여 앞으로 10년 뒤에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의 결의를 ‘극소수 운동권 핵심세력의 희망사항’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결의를 실천하기 위해 10년 동안 헌신분투한 결과 놀라운 현실이 펼쳐지게 되었다. 2001년 9월 23일 513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10년 뒤에 실현하겠다고 결의한 때로부터 11년이 지난 2012년 3월 8일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와 한명숙 당시 민주당 대표가 두 당이 합의한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은 6.25전쟁 이후 정치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당들 사이의 정책연합을 실현한 주목할 만한 사변이었다. 그 두 원내정당의 정책연합은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제기하였던 진보적인 정책의제들이 그 두 당의 공동정책의제에 포함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는 “과거 총선과 대선 때마다 현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주장했던 정책들이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에) 다수 포함됐다”고 지적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미FTA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즉각 중단, 국립대학 법인화 폐지, 대기업의 순환출자 금지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이다. 

둘째,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려는 것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이처럼 ‘정책연합’을 실현한 것은 그 두 당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승리함으로써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강력한 공동집권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는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시만 해도 집권과는 관계없는 노동자정당, 이념정당이었다. 그러나 소수자정당이 내세웠던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대상황변화와 ‘선거연대’라는 정치공학과정을 거치면서 집권을 내다보는 정당의 정책이 되어가고 있다”고 크게 ‘우려’하였다.

원래 공동정부구성을 처음으로 제안한 쪽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노컷뉴스> 2010년 1월 8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1월 7일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신년기자회견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에게 6.2지방선거에서 연대하고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1년 1월 수많은 유권자들은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컨대,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결과를 인용한 <경향신문> 2011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범여권단일후보와 범야권단일후보의 양자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경우 범여권단일후보 지지도는 38.5%밖에 되지 않았는데 범야권단일후보 지지도는 45.5%나 되었다. 

당시 일반국민들은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고도의 정치변화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범야권단일후보에 대한 기대감은 매우 높았다. 그런 기대를 안고 대권주자로 떠오른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이사장은 2011년 9월 1일 공식석상에서 “야권대통합의 목적은 총선, 대선승리가 아니라 정권교체를 통해 진보개혁진영의 공동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9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승리하여 사상 최초의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국정원은 왜 2010년 5월부터 내사를 시작하였을까?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2012년 대선에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는 경우, 여권후보를 꺾고 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그에 따라 그 두 당이 구성한 공동정부가 등장할 가능성도 높았다. 

만일 공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노력이 아무런 반대와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박근혜정권의 탄압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기대와 희망과 요구는 전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기대와 희망과 요구와 어긋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향한 기대와 희망과 요구가 사라지고 새누리당이 정권연장에 성공한 사태로 귀결된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원인은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극력 거부한 반대세력의 대응이 있었다. 그런 대응행동이 당시 이명박정권에 의해 취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명백하다.

이명박정권이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행동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함으로써 그 당과 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여론재판’을 벌여놓고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하면, 민주당은 그 당과 자연히 거리를 두게 될 것으로 타산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타산에 따라 이명박정권에게는 ‘종북정당’ 모략을 위한 ‘증거’들이 필요하였는데, 이명박정권 시기의 국정원이 ‘증거수집’에 나섰다. <동아일보> 2013년 8월 28일 보도기사에서 차경환 수원지검 2차장 검사는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하여 현재 구속 중인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2010년 5월부터 시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국정원은 통합진보당(당시는 민주노동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왜 2010년 5월부터 시작했을까? 그 까닭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이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뜻밖의 성과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2010년 2월 10일 ‘2010 지방선거 공동승리를 위한 야5당 협상회의’가 결성되었고, 2월 16일에는 ‘야5당 정책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쉽게도, 야5당은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바람에 그 합의를 이행하지는 못했지만, 2010년 4월 현재 지지율 13.3%를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민주노동당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를 실현하여 142명을 당선시켰고, 민주당과 손잡고 두 곳에서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였고, 26곳에서 공동지방정부구성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6.2지방선거에서 지역별 야권연대를 통해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한 사상 최초의 경험은 당시 2년 앞으로 다가온 2012년 12월 대선에서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성큼 앞당긴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둘째,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에게 있어서 공동정부수립은 그 당의 최종목표가 아니었다. 그 당의 최종목표는 진보적 정권교체였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은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중단단계를 거쳐 2017년 대선에서 마침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려는 단계적 실현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동정부수립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려는 민주노동당의 집권전략을 간파한 국정원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국정원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를 통한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2010년 5월부터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를 감행하면서 무슨 ‘대북혐의점’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썼어도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정원의 집중내사는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에서 실패한 국정원이 ‘북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를 적발하였다고 하면서 2011년 7월 8일에 터뜨린 것이 이른바 ‘왕재산사건’이다. 


국가안보실이 말하는 ‘비정형적 도발’과 국정원이 말하는 ‘내란예비음모’ 

2013 년 5월 28일 <연합뉴스>는 흥미로운 보도기사를 실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박근혜정권이 출범하기 하루 전날인 2013년 2월 24일 청와대에 들어가 위기관리상황통제권을 넘겨받은 뒤로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자택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해오다가 5월 24일에야 자택으로 퇴근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3개월 동안 청와대 인근 군부대의 장교숙소(BOQ)에서 숙식을 해결하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택에 잠깐씩 들렀다고 한다. 안보부문 최고책임자인 국가안보실장이 3개월 동안 그처럼 긴박한 비상특근태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전쟁재발위험이 어느 정도로 격화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자기들은 그처럼 초긴장상태에 있었으면서도, 3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재발위험이 사실대로 알려지면 남측에서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날까봐 그들은 전쟁재발위험에 대해 쉬쉬하며 관련정보를 통제하기에 급급하였다. 

중요한 것은, 김장수 국가정보실장이 3개월 동안 집에 가지도 못하고 군부대 장교숙소에서 숙식하며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한 2013년 2월 24일부터 5월 24일까지 3개월 동안의 상황이 ‘위기관리단계’에 근접한 비상사태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관리단계’란 박근혜정권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박근혜정권은 출범과 함께 그런 비상사태를 맞았지만,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위기관리단계’에 진입하는 경우, 정권 차원의 긴급대응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는데, 당시 박근혜정권에게는 그런 긴급대응행동을 취할 준비가 거의 없었다. 박근혜정권이 ‘위기관리단계’에 대처하여 긴급대응행동을 취하려면, 우선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부터 있어야 하는데, 2013년 4월 말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그 두 지침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머니투데이> 2013년 4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여 “국가위기요인을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 국가전쟁지침, 국가위기관리지침도 작성 중이고 8월까지 안보관련 최고지침인 국가안보전략지침을 확정해 정부 내에 배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고 말한 ‘국가위기요인’들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2013년 3월 9일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새로 출범한 박근혜정권의 고위관리들이 2013년 3월 8일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진행된 긴급회의에서 ‘북의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하였는데, 그들이 예상한 네 가지 유형의 도발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들어있었다. 또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철도역과 같은 대중이용시설을 중심으로 테러위험 등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내용을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시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국정원과 검찰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구속, 기소할 때, 그들이 “RO라고 부르는 혁명조직을 결성하고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조작, 적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조작된 혐의는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된,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음모”에 대한 혐의와 일맥상통한다.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

<연합뉴스> 2013년 11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이 날 열린 첫 공판에서 통합진보당 구속자 공동변호인단은 국정원이 2013년 7월까지만 해도 이른바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이 아니라 이전 민주노동당 시절에 당직자였던 다른 사람으로 ‘추정’하였고, 이석기 의원은 “RO중앙팀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2013년 8월에 갑자기 이석기 의원을 ‘RO총책’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동변호인단은 그처럼 갑작스러운 변경행위야말로 국정원과 검찰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음모사건’을 조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을 ‘RO총책’으로 지목하고 그를 2010년 5월부터 3년 동안 계속 감시해오다가 2013년 8월에 갑자기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으로 교체하면서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검거를 자행하였고, 박근혜정권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통합진보당 인사들에게 씌워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였던 것이다.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취지로 말한 발언내용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비춰보면, 박근혜정권은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비정형적 도발(내란)’을 예비한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하였다는 탄압사유를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대선개입 범죄행위가 드러나 그들을 처벌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각계각층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자, 대선개입을 자행한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규탄과 비난을 피해보려는 의도에서 국정원이 통합진보당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그런 요인도 작용하였겠지만, 원내정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전대미문의 탄압은 국정원과 검찰이 자행하는 공안기관 수준의 탄압을 넘어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따라 자행되는 정권 차원의 특대형 탄압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기밀이어서 무슨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두 지침에는 1999년 2월 국정원이 작성한 ‘전시대비 비밀문서’에 나오는 이른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도 포함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비밀문서에 나오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은 “위기관리단계에서 남파간첩출신, 사회주의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인물, 북한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을 (국정원이) 경찰, 검찰, 기무사와 함께 특별관리한다”는 것이다. ‘위기관리단계’에서 국정원, 경찰, 검찰, 기무사 등이 자행하는 ‘특별관리’는, 전시에 진보세력이 내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한 극우독재정권이 진보세력을 말살하려는 선제대응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그 당에 확대, 적용하는 최악의 경우에는 공안기관만 탄압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탄압에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판단이라는 점을 밝혀준 것은 <연합뉴스> 2012년 10월 10일 보도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이 날 한국군 전체 부대에 배포한 이른바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종북세력”으로 지목한 진보세력을 “국군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전시상황이 조성될 경우 군부가 나서서 진보세력을 말살하겠다는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6.25전쟁이 종전되지 못하고 매우 불안정한 정전상태에서 전쟁재발위험이 전례 없이 격화된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하였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그런 내용을 담은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하였고, 그에 따라 통합진보당을 말살하려는 전대미문의 대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경악할 사태를 보면서 60여 년 전 이승만정권이 전시에 자행한 끔찍스러운 대학살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연상작용이 아니다. 그런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실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진보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 처형한 이승만정권은 식민지시기에 항일세력을 짓누른 일제의 탄압도구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모방하여 1949년 6월 5일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30여 만 명에 이르는 진보세력을 그 단체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승만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에 공표한 ‘비상조치령 제1호’에서 “국가적 위기에 당하여 반국가죄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속히 또는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명령에 따라, 군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까지 3개월 동안 남측 전역에 산재한 168개소의 집단학살지에서 ‘보도연맹원’ 30여 만 명 대부분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4.19민주항쟁 직후인 1960년 10월 전국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이 정부기관에 제출한 자료를 인용한 <매일신문> 2000년 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6.25전쟁 발발 전후 진보세력과 그 가족 113만 명을 집단학살하였다고 한다.  


통합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2013년 10월 23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그는 워싱턴 방문 중에 수전 라이스(Susan E. Rice)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척 헤이글(Chuck Hagel) 국방장관,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국가정보실장을 차례로 만났다. 이제껏 워싱턴을 방문한 남측 역대 정부의 고위관리들 가운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방장관, 국무장관, 국가정보실장을 두루 만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언론매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의 환대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했지만, 그런 떠들썩한 환대는 과시용이었고, 미국의 실세들이 진짜 환영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미국의 실세들은 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그처럼 환영하였을까? 그의 경력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고, 2006년 노무현정권 말기에 국방장관이 되었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 된 경력이다. 그런데 미국은 2006년 국방장관이었던 그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였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었던 그에게 또 다시 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출신자들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포함하여 모두 24명인데, 그들 가운데 미국의 공로훈장을 3년 동안 두 차례나 연거푸 받은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의 공로훈장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미국을 위해 특출한 공을 세운 사람이 미국의 공로훈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공로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이색적인 경력은 그가 미국을 위해 어떤 특출한 공을 세웠음을 말해준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이전에 미국을 위해 무슨 공을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특이한 수상경력은 그가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그처럼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하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군사령관이 행사하는 현실조건에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할 때, 미국과의 협의과정을 거쳐 그 두 지침을 작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은 박근혜정권의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협의할 때, ‘위기관리단계’에서 취하게 될 선제대응에 대해서도 당연히 협의하였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박근혜정권만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미국도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한다. 미국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한반도에서 반미자주화의 기치를 든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미국의 국익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것이므로, 미국은 통합진보당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막후에서 은밀히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이 ‘위기관리단계’의 선제대응에 관해 협의할 때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은밀한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2012년 8월 25일 <민중의 소리>에 실린 나의 글 ‘미국의 한국 진보정당 압살은 반복되는가?’에서 논한 것처럼,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던 진보당의 지도자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씌운 이승만정권은 1958년 2월 25일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였고, 대선 8개월 전인 1959년 7월 31일에는 조봉암의 사형집행까지 감행하였는데, 그런 악랄한 정치탄압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 

54년 전에 있었던 진보당 강제해산에 대한 기억은, 오늘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자주민보 2013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