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에 떠도는 ‘쇼와 요괴’의 전쟁의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전후 일본 정치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이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1896-1987)다. 쇼와라는 말은 조선침략원흉이며 전범우두머리인 히로히토(裕仁)가 일본 국왕으로 재임한 1926년부터 1989년까지 기간을 뜻한다.

원래 기시 노부스케는 일제가 조작한 ‘대일본 만주제국’의 최고실권자였는데, 일제가 패망하자 1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도쿄에 있는 스가모형무소에 3년 동안 수감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업실(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요원들이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된 1급 전범들을 조사하다가 눈독을 들인 전범 재소자가 기시 노부스케였다. 나중에 미국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신상조사서에는 기시가 “열렬한 반공주의자”이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1948년 12월 23일 1급 전범 7명을 교수형에 처한 미국은 이튿날 기시 노부스케를 슬그머니 석방하였다. 미국은 자기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그를 살려놓은 것이며, 그로써 기시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추종하는 친미주의자로 탈바꿈하였다. 미국은 자기들이 살려놓은 전범을 어떻게 이용하였을까?

‘쇼와의 요괴’를 살려주고 길러준 미국의 비밀공작

‘뉴욕 타임스’ 1994년 10월 9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나중에 미국 국무부 일본담당관을 지낸 유진 두먼(Eugene F. Dooman)은 무기생산필수품인 텅스텐을 6.25전쟁 시기에 일본에서 밀수하여 미국 군부에 판매하는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는데, 그의 텅스텐 불법거래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은밀한 보장조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텅스텐 불법거래의 뒤를 봐주며 챙긴 비자금을 일본의 친미극우세력을 정치세력화하는 비밀공작에 쏟아 부었는데,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자금을 받으면서 정치세력화한 일본 극우세력의 핵심인물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다. 그는 ‘만주인맥’을 동원하였고, 미국 중앙정보국은 ‘만주인맥’에게 비밀자금을 퍼주었다. ‘대일본 만주제국’ 고위관료 출신자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결집한 극우세력이 바로 ‘만주인맥’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일본에서 비밀자금으로 육성한 극우정당이 1955년 11월 15일에 출현하였으니, 그것이 일본의 현 집권당인 자민당이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은 자민당 창당자금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창당 이후에도 그 당에 비밀자금을 계속 제공하였고, 일본정부 고위관리들에게도 비밀자금을 제공하여 일본내각 안에 중앙정보국 ‘끄나풀’을 박아 두었다.

미국의 비밀공작으로 교수형을 면하고, 미국의 비밀자금으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 기시는 1957년 2월 25일 일본총리가 되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 팀 와이너(Tim Weiner)가 방대한 비밀문서를 분석하고 많은 관련자들과 대담하는 노력으로 집필한 역작 ‘잿더미로 남은 유산:CIA의 역사(Legacy of Ashes:The History of the CIA)’가 2008년 5월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한때 전범으로 몰락했던 기시 노부스케를 자민당 총재로, 일본총리로 화려하게 재기시킨 극적인 반전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미국은 일본총리가 된 기시를 1957년 6월 워싱턴으로 불러 연방의회합동연설에 출연시켰고, 뉴욕에 있는 야구전용경기장인 양키스타디움(Yankee Stadium)에서 미국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구(始球)의 기회도 안겨주었고,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골프회동을 갖게 만들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은 흉악한 전범을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둔갑시켜 국제 정치무대에 세워준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전후 일본정치를 그처럼 마음대로 주물렀으니, 그들의 눈에 일본정치보다 한 급 아래로 보인 한국정치가 그들의 비밀공작에 의해 얼마나 변태적으로 가공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기시는 일본총리가 된 뒤에도 여전히 미국의 비밀자금을 받아 챙겼는데, 그는 1958년 6월 29일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 당시 일본재무상을 더글러스 맥아더 2세(Douglas MacArthur II) 당시 주일미국대사에게 보내 비밀자금을 또 다시 달라고 요청하였다. 사토 에이사쿠는 기시의 친동생이며, 나중에 총리가 된 인물이다.

‘요시다 독트린’ 폐기하고 핵무장까지 노린 ‘요괴’의 망동

교수형으로 사라졌어야 할 전범이 미국의 비밀공작에 의해 일본정계의 최고실력자로 변신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흑막은 전후 일본 정치사에 은닉된 비극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되자마자 ‘요시다 독트린(Yoshida Doctrine)’ 폐기문제를 들고 나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망동을 저질렀다.

미국에서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르는 일본의 전후 정치외교노선은 무엇인가? 미일상호방위조약의 핵심내용은, 미국이 일본의 안전을 지켜주는 대가로 일본은 자국 영토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무상제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조약에 따르면, 만일 북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경우에도 일본은 자국 영토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것뿐이고 일본자위대는 북미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본자위대의 교전불가원칙은 일본의 교전권을 포기한 일본헌법 제9조와 부합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미국은 ‘창’의 역할을, 일본은 ‘방패’의 역할을 각각 맡겠다는 것인데, ‘방패’의 역할을 맡은 일본의 정치외교노선을 미국에서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른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일본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1967)가 1954년 11월 10일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과 채택한 공동성명에서 그러한 정치외교노선을 천명하였기 때문에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른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요시다 공동성명은 채택된 지 불과 3년 만에 휴지조각으로 되었다. 아이젠하워-요시다 공동성명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장본인은 기시 노부스케다. 그는 1957년 6월 21일 당시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미일공동코뮈니케를 발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의 방위력 증강계획을 환영하고, 모든 주일미국지상군의 즉각적인 철군을 포함하여 주일미국군 병력을 대폭 축소할 것이며 일본의 방위력이 증강되는 데 따라 더 축소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공동코뮈니케는 주일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시키고 일본을 재무장시켜 대외침략의 길을 열어놓으려는 ‘만주인맥’의 전략구상을 외교문서화한 것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기시가 추구한 일본의 재무장이 결국 핵무장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1958년 9월 9일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국방부 회의록이 2013년 3월 16일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는데, “기시 총리는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는 맥아더 2세 당시 주일미국대사의 발언이 그 회의록에 적혀 있다. 또한 1958년 6월 20일 맥아더 2세 당시 주일미국대사가 존 덜레스(John F. Dulles) 당시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밀전문이 2013년 3월 16일에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 야마다 히사나리(山田久就)가 맥아더 2세와 담화하면서 지금 일본 외무성이 핵무기를 보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그 비밀전문에 나온다.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재임기간에 미국의 은밀한 사주를 받으며 다그친 일본의 재무장은 대외침략을 위한 사전준비였다. 1960년 6월 23일 맥아더 2세 당시 주일미국대사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郞) 당시 일본외상이 서명한 ‘조선유사의사록’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2008년 2월 말 미국 미시간대학교 포드대통령도서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후지야마 외상이 기시 총리로부터 권한위임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주한유엔군에 대한 (북의) 공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국은 일본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고 주일미국군기지를 즉각 사용할 수 있다”고 밀약한 비밀문서였다. 후지야마가 미일동맹군의 대북공격구상을 담은 밀약문서에 서명한 바로 그 날, 그 밀약의 장본인이었던 기시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의를 표명하였다. ‘쇼와의 요괴’가 연출한 정치촌극이었다.

일본총리 아베 신조의 쇼인신사 참배

위에서 언급한 자료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자위대의 교전권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서 핵무장까지 갖춘 다음, 미국군의 뒤를 따라 대북침공을 준비하려고 획책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살려준 1급 전범 출신의 열렬한 반공주의자이며,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자금으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 일본정계의 최고실력자인 기시의 전쟁의지는 그처럼 집요하였다.

그러나 기시의 전쟁의지는 일본의 재무장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을 뿐이다. 부분적 실현이라는 말은 일본이 북을 침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공격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또한 일본자위대의 교전권 확보는 일본 야당의 저지, 일본 국민의 반대여론, 일본 진보세력의 저항에 밀려 지난 50년 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기시가 전쟁의지를 드러냈던 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일본에서는 더욱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일본 재무장의 실현과 독자적인 대북공격력 획득을 획책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기시의 전쟁의지를 오늘에 와서 기어이 실현하려는 ‘요괴의 후예’들이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준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극우세력은 일제가 식민지강점기에 조선에서 저지른 죄악을 청산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망언을 일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도강탈책동과 역사왜곡사태로 소란을 피우더니 결국 기시의 전쟁의지를 실현해보려고 광란하는 중이다. 그러한 정치적 광란을 부채질하는 선동가가 등장하였으니, 그가 바로 2012년 9월 26일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12월 26일 일본총리로 선출된 아베 신조(安培晋三)다. 아베 신조야말로 기시의 전쟁의지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요괴의 후예’다.

2013년 8월 13일 아베는 쇼인신사를 참배하고 나서 “나는 처음 중의원 의원에 입후보하기로 뜻을 세웠을 때도 (쇼인신사를) 참배하였다. 올바른 판단을 하기로 맹세하였다”고 중얼거렸는데, 쇼인신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조선침략원흉들을 자기 사숙(私塾)에서 직접 가르치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설계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기리는 장소다. 그러므로 아베의 쇼인신사 참배는 그가 ‘정한론(征韓論)’을 부르짖으며 광란하던 조선침략론자들로부터 정신적 계보를 이어받았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아베는 2006년 9월 26일부터 2007년 9월 26일까지 1년 동안 총리를 짧게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재임기간에 그가 추진한 일은 기시가 미완으로 남긴 일본 재무장의 완성이었다. 당시 아베는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키고, 수륙양용부대(해병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 재무장의 완성을 다그치는 한편, 교육기본법을 개정하여 우익국가주의교육의 길을 열어놓았으며, 종군위안부 강제연행범죄를 부인하는 등 일제의 범죄사를 부정하는 망발을 늘어놓았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 아베는 자신이 총리직에 있을 때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못한 것이 “통한”이라고 하면서 버젓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였다.

그런 그가 또 다시 총리가 되어 ‘요괴’의 전쟁의지를 실현하려고 광란하는 중이다. 아베가 실현하려는 ‘요괴’의 전쟁의지를 정리하면, 일본헌법 및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 미일동맹 강화에 의거한 자위대 역할 확대, 일본의 집단적 교전권 확보다.

다카키 마사오를 첫 눈에 알아본 ‘쇼와의 요괴’

1970년 6월 18일 ‘동아일보’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한 기시 노부스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박정희는 왜 기시에게 수교훈장을 달아주었을까?

한국의 ‘만주인맥’을 대표하는 사람이 일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대일본 만주제국’ 육군 중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의 일본 이름)이고, 일본의 ‘만주인맥’을 대표하는 사람이 ‘대일본 만주제국’을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다. 일제에게 충성한 그 두 사람이 일제의 패전과 만주국의 멸망 이후 ‘만주인맥’을 되살리며 의기투합한 첫 사건은 5.16군사반란으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1961년 8월에 있었다.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는 직함으로 밀서 한 통을 도쿄에 보냈는데,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그 밀서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들보다 한일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는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한 신영민 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양국의 강인한 유대는 역사적 필연이라 주장하는 귀하의 뜻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장차 재개될 국교정상화 교섭에 서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정희가 작성한 밀서의 수신인은 기시 노부스케였다. 박정희의 밀서를 읽어보면, 기시가 박정희의 중학교 동창인 신영민을 자신의 밀사로 서울에 파견하여 한일수교문제에 관한 박정희의 의도를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수교회담 과정에서 언론에 오르내린 사람은 기시 노부스케의 후임총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1899-1965)였지만, 그 과정에서 막후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기시 자신이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14일 백악관을 방문하여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는데, 워싱턴에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총리부터 만났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케네디는 미국에 오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총리부터 먼저 만나라고 박정희에게 요구하였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제시한 방미조건은 한일유착이었고, 박정희를 지지해주는 대가로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1961년 11월 11일 일본총리관저에서 열린 박정희 방일 환영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그 동안 밀사파견을 통해 서로 연락해오던 박정희와 처음 대면하였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극적인 만남에 대해 기시는 “박정희 씨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때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고 나에게 말하였다”고 회고록에 서술하였다. 기시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와 자신의 만남에 대해 그 이상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를 초청한 일본의 최대 관심사는 한일수교회담 재개에 있었으므로, 기시가 박정희에게 한일수교회담 재개를 요구한 것은 당연하였다.

기시의 막후공작에 의해 재개된 한일수교회담은 1963년에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경향신문’ 2001년 11월 3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때도 박정희는 기시에게 밀서를 보냈다. 밀서에서 박정희는 “박흥식 씨 편으로 귀하의 서신을 접하고 다시 그 편으로 답신을 보냅니다.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해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고 썼다. 이 밀서에 따르면, 기시는 한일수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거물급 친일파인 박흥식을 자신의 밀사로 박정희에게 파견하여 막후조정을 꾀하였던 것이다. 결국 한일수교회담은 일제의 식민지죄악청산은 고사하고 되레 독도영유권까지 일본에게 양보한 채 1965년 6월 22일 굴욕적으로 결속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대일본 만주제국’ 육군 중위 출신 박정희가 ‘만주인맥’을 틀어쥔 ‘요괴’의 계략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주인맥’의 후손들이 손을 잡는 날

박정희-기시 노부스케의 첫 만남이 있었던 때로부터 38년이 지난 1999년 8월 2일 해상구조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사상 최초의 한일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한일합동군사훈련은 기시에게 보낸 박정희의 밀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만주인맥’의 강인한 유대를 역사적 필연이라고 강조했던 전범의 전쟁의지가 38년 뒤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첫 한일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때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 한일관계는 어디까지 왔을까?

박정희에게 보낸 밀서에서 ‘만주인맥’의 강인한 유대가 역사적 필연이라고 썼던 기시의 뜻을 이어받은 일본총리 아베 신조는 지금 집단적 교전권을 확보하려고 광란하는 중이다. 아베가 말하는 집단적 교전권이란 미국이 공격을 받는 경우 일본자위대가 미국군과 함께 집단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뜻인데, 미국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한 나라는 지구 위에서 북한 밖에 없으므로, 집단적 교전권이란 집단적 대북교전권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일본자위대의 집단적 대북교전권을 확보하기 위한 첫 공정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로 전개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교환하려는 군사정보는 대북군사정보인데, 대북정보자산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으며, 일본은 미국의 대북정보자산에 의존하는 처지다. 일본이 운용하는 정찰위성체계는 미국이 운용하는 정찰위성체계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정보자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정보가치가 있는 대북군사정보를 받기 힘들고, 더욱이 해마다 두 차례씩 진행되는 한일정보교류회의에서 대북정보를 상호교환하고 있으므로, 군사정보에 관한 협정을 따로 체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과 일본은 이미 2008년부터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문제를 실무자급에서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2011년 1월에 진행된 한일 국방장관-방위상회담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12년 6월 26일 이명박 집권기의 청와대 국무회의는 즉석안건으로 상정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밀실처리하였다. 밀실처리에 대한 국민의 비난과 반대가 거세지자, 그들은 협정서명을 연기하는 ‘꼼수’를 부리면서 반대여론을 무마하고 슬그머니 넘어갔지만, 협정서명은 시간문제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에 숨겨진 의도를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협정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이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여 상호교환하려는 정보는 대북군사정보가 아니라 한국군과 일본자위대에 관한 군사정보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면, 한국군은 일본자위대에 관한 군사정보를 받게 될 것이고, 일본자위대는 한국군에 관한 군사정보를 받게 될 것이다.

둘째, 협정문에는 군사정보만이 아니라 군사장비들도 교환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자위대가 자기 군사장비를 한국군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군사정보와 군사장비의 상호교환은 한국군과 일본자위대가 미국군의 작전계획에 따른 대북전쟁연습을 공동으로 준비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일본자위대의 집단적 대북교전권을 확보하기 위한 첫 공정은 2008년에 시작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논의와 더불어 같은 해에 시작된 한미일 3자군사훈련이다. 한미일 3자군사훈련은 2008년 8월 5일 하와이 근해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2012년부터 규모가 확대되어 해마다 두 차례씩 실시하고 있다. 3자군사훈련은 2012년 6월 21일 동중국해 북방해역에서, 그리고 8월 7일 하와이 근해에서 각각 실시되었고, 올해 2013년에는 5월 15일과 10월 10일에 동중국해 북방해역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특히 올해 10월 10일에 실시된 3자군사훈련에는 미국 제7함대 핵추진항공모함, 일본해상자위대 항모급 헬기호위함, 한국해군 구축함을 비롯한 방대한 해상타격수단이 동원되었다.

한일군사관계가 이처럼 미국의 전략구상에 따라 밀착되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망발 때문에 한일정상회담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유예행동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한겨레’ 2013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2013년 2월 22일 워싱턴에 있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연설한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한일관계에 관한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나의 외할아버지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과 매우 가까운 관계였습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만나는 날, 두 정상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반세기 전 밀약하였던 ‘만주인맥의 강인한 유대’를 계승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자위대가 집단적 대북교전권을 확보하고, 미국이 지휘하는 한미일 대북전쟁연습을 본격화함으로써 ‘요괴’의 전쟁의지를 실현하려는 계승이다. ‘만주인맥’의 후손들인 독재자의 딸과 전범의 외손자가 손을 잡는 정상회담에서는 ‘요괴’의 전쟁의지를 되살리는 군가가 울려나오게 될 것이다. (민중의 소리 2013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