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이후 10년, 한(조선)반도 정세변화를 논한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두 개의 관계를 중심으로 변화된 정치정세
2. 1994년은 정세변화의 기점이었다
3.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
4. 정세변화의 발생요인은 핵보유다
5. 6자회담 구도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6. 미국에게 반전의 기회는 없다
7.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략과 주한미군 철군문제

1. 두 개의 관계를 중심으로 변화된 정치정세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한(조선)반도 정치정세는 놀라운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 10년은 흔히 급변 또는 격동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정세변화가 일어난 격변기였다. 1945년 8.15 해방부터 1953년 7월 정전에 이르는 8년을 내놓고 본다면, 우리 나라 현대 정치사에 그처럼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1994년 이후 10년 동안 한(조선)반도 정치정세의 변화가 두 개의 관계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미관계의 변화와 남북관계의 변화를 뜻한다.

대미관계와 남북관계에서는 언제나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변화의 주체가 되었다. 한(조선)반도 정치정세를 변화시켜온 요인과 동력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조선)반도 정치정세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민족주체적 관점을 갖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

이를테면 생물체는 생물계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질을 획득하는데, 새로운 질을 획득한 생물체는 주변환경에 대해 이전과 다르게 반응하는 새로운 생물체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 동안 대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변화과정에서 새로운 질을 획득한 한(조선)민족은 한(조선)반도 정치정세가 아직 변화과정에 들어서지 못했던 1994년 이전의 정세에 존재하였던 그런 민족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 진행되어온 정세변화과정에서 한(조선)민족이 획득한 새로운 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적 자주성과 민족적 동질성이다. 다시 말해서, 한(조선)민족은 대미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주성을 획득하였고, 남북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동질성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1994년 이후 10년 동안 진행되어온 정치정세변화에 대한 총화는, 한(조선)민족이 대미관계와 남북관계를 각각 변화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주성과 민족적 동질성을 획득하였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글의 길이가 제한적이므로, 논의범위는 한(조선)민족이 대미관계를 변화시켜온 문제에 한정된다.

2. 1994년은 정세변화의 기점이었다

한(조선)민족이 대미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주성을 획득하였다는 말에서 중시할 것은, 대미관계가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에 의해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는,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가 미국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에 의해서 변화되어왔다고 본다.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보면, 1945년 8.15 해방부터 1953년 정전에 이르는 8년 동안에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변화를 주도한 쪽은 미국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조선)민족은 미국이 강제한 분단체제의 수립, 남(한국)의 대미예속화, 그리고 6.25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대미관계를 자주적 요구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에서 역량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쪽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 동안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는 장기적 대치상태에 놓여있었다. 1994년을 정세변화의 기점으로 보는 까닭은,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주동적인 노력으로 40년 대치상태를 파열시키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마침내 1994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4년의 정치정세를 되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94년에 '핵문제'를 두고 조·미 대결이 최고조로 격화되었으나, 결국 그 대결은 클린턴 정부의 정치적 패배로 일단 마무리되고, 조·미 정치회담과 남북최고위급회담이 각각 추진일정에 올랐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조·미 정치회담과 남북최고위급회담은 연기되었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김일성 주석의 서거에 조의를 표하였던 반면, 김영삼 정부는 조의표명 대신 험악한 대결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1994년 8월부터 1997년 12월 남(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4년 동안 최악의 상태에 놓였다.

남북최고위급회담이 6년 동안 연기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미 정치회담은 1994년 8월부터 제네바에서 재개되어 같은 해 10월에 조·미 기본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기본합의에서 조·미 두 나라가 '핵문제'를 해결하면서 양국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한다는 점을 명시한 것은, 조·미 관계의 정상화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북(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미국에게는 정치적 패배였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여 주한미군을 철군시키려는 북(조선)에게는 정치적 승리였다.

1994년 10월에 조·미 기본합의가 체결된 이후 2000년까지 6년 동안, 비록 미국의 간헐적인 반동적 파탄기도로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이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와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가 약 2년 시차를 두고 각각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에 부응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함으로써 2000년 10월에 워싱턴에서 조·미 공동성명이 채택되었고, 2000년 말에는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논의되는 높은 수준까지 조·미 관계가 급변하였던 것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

1994년 이후 10년 동안 일어난 정치정세변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조선)민족 내부에서는 주체역량과 대미예속세력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대미예속세력이 아니라 주체역량이다. 민족적 자주성이 없는 대미예속세력은 한(조선)민족을 대표하지 못한다. 한(조선)민족 내부에서 주체역량과 대미예속세력이 대립하게 된 것은, 분단체제에 의해서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가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근 60년 동안,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은 언제나 대미관계에서 자주성을 지키면서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한(조선)민족의 대미예속세력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에 묶여있었다.

둘째, 1994년 이후 10년 동안,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 자체가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는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분단체제에 의해서 조성된 분리·격폐상태를 넘어서 하나의 통일적 역량을 형성하여왔음을 말해준다. 지난 10년 동안 남(한국)민중의 주체역량과 북(조선)의 주체역량은 하나의 반미자주적 지향을 가진 통일적 역량으로 결집되어왔다.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은 대미관계의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통일전선을 구축하여왔다. 그것을 반미민족통일전선이라고 부른다.  

셋째, 북(조선) 대 미국의 관계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대결하는 관계이며, 그 대결관계에서 사회주의는 반미정치군사전선을 구축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다. 그에 비해서,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는 민족주체역량과 제국주의세력이 대결하는 관계이며, 그 대결관계에서 민족주체역량은 반미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다.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반미민족통일전선에서 전개되는 반미자주화운동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만일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반미자주화운동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조선)반도 정치정세의 변화방향을 결정짓는 요인과 동력은 한(조선)민족의 반미민족통일전선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4. 정세변화의 발생요인은 핵보유다

'핵문제'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문제를 뜻한다. '핵문제'는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에서 중대현안으로 떠올랐으며,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역시 '핵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행되는 조·미 정치회담은 북(조선)의 주체역량이 남(한국)의 주체역량과 무관하게 단독으로 벌이는 정치활동이 아니다. 조·미 정치회담은 반미정치군사전선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 북(조선)의 대미정치투쟁일 뿐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구축한 반미민족통일전선의 강화·발전을 촉진시킨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문제가 왜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일까?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는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대미관계에서 강력한 물리적 수단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강력한 물리적 수단을 가지는 경우, 정치정세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 문제를 역사적 경험과 견주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15 해방부터 1953년 정전까지 8년 동안에 미국이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짓누르면서 분단체제 수립, 남(한국)의 대미예속화, 전쟁을 추구하였던 요인은, 미국이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핵무기를 보유한 것에 있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Josif Stalin), 영국 수상 애틀리(C. R. Attlee),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문제를 논하였던 포츠담회의(Potsdam Conference)가 진행되는 도중인 1945년 7월 16일에 미국 뉴멕시코주의 앨러모고도(Alamogordo)에서 실시한 핵폭발실험이 성공했다는 급전이 회의장에 날아들었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는 전후처리과정에서 미국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당시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미국은 핵폭발실험이 성공하자 곧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후 세계질서를 제멋대로 개편·장악하였다. 분단체제 수립, 남(한국)의 대미예속화, 6.25전쟁으로 이어진 한(조선)반도 정세의 질적 변화는, 결국 미국의 핵무기 보유를 요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과 대조적으로, 1994년부터 한(조선)반도 정치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를 요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북(조선)이 핵전쟁에 사용할 수 없는 원시적인 핵폭탄 한 두 개를 지하저장고에 감춰놓고 있다는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왜곡발표는 논박할 가치가 없으므로 외면한다.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대결하는 조·미 관계에서 반미정치군사전선의 역량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주었으며,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에서 반미민족통일전선의 강화·발전을 촉진시켰다. 미국이 지난 10년 동안 '핵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려 파상공세를 거듭한 까닭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형성시킨 물리적 요인인 북(조선)의 핵무기를 없애버리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5. 6자회담 구도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2004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 제3차 6자회담이 열렸다. 부시 정부는 이번에 처음으로 일곱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제안을 내놓았고, 조·미 양자회담이 2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다. 미국 언론과 일부 분석가들은, 제3차 6자회담 이전까지 아무런 제안도 내놓지 않고 시간 끌기로 일관해왔던 부시 정부가 이번에 제안을 내놓았으니, 이제 6자회담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논의단계에 진입하였다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는, 그러한 논평은 피상적 관찰이 빚어낸 착오로 보인다. 잘라 말해서, 제3차 6자회담에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은 부시 정부의 교활한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이번에 제안으로 내놓은 이른바 '다단계의 포괄적 비핵화방안'이라는 것은 해결방안이 아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4년 6월 23일자 보도는, "미국의 제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정한 시행시간을 설정하고, 요구조건을 상대적으로 집약시킨 형태로 공식제출한 것 이외에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고 논평하였다.

부시 정부의 제안에 들어있는 요구조건은, 북(조선)에 있지도 않는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하여 모든 핵시설을 공개하는 전면적인 공개, 평화적인 핵활동까지 폐기하는 전면적인 폐기, 의심지역을 어디든지 지목하고 언제든지 사찰하는 전면적인 사찰, 핵동결 이후 핵폐기를 준비하는 기간은 3개월로 정한다는 준비기간 설정 등이다. 이것은 북(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요구들이다. 그러한 불합리한 요구를 제안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것은,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다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6자회담에서 부시 정부가 마치 협상을 진지하게 진행하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위장전술이며, 오는 11월에 미국 대통령 선거를 무난히 넘기려는 대선용 계략이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郞)가 추락하는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하여 조·일 관계개선이라는 계략을 허둥지둥 들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부시(George W. Bush)도 추락하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핵문제' 해결방안 제시라는 계략을 들고 나온 것이다.

부시 정부가 조성해놓은 6자회담 구도에서는 '핵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부시 정부는 '핵문제'를 해결하려고 6자회담 구도를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핵문제'에 관한 다자회담을 계속 진행하면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지연술책으로 6자회담 구도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6자회담을 지속하더라도 '핵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6자회담 구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남(한국)의 주체역량과 북(조선)의 주체역량이 하나의 반미자주적 지향을 가진 통일적 역량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고,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그 구도 안에서 '핵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위에서 지적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혐오하면서, 그러한 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미국이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방도는, '핵문제'를 국제화하여 남(한국)과 북(조선)이 별개의 두 나라로 참가하는 다자회담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부시 정부가 북(조선)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남(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끌어들여 6자회담 구도를 형성하는 데 열중했던 까닭은, 남(한국)과 북(조선)이 두 나라로 참가하는 다자회담 구도를 형성하여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남(한국)과 북(조선)의 분단현실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로 몰아가려는 미국은 1970년대 후반에 저들이 등장시켰던 해묵은 '두 코리아 정책(Two-Korea Policy)'을 6자회담 구도에서 재연하려고 했던 것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부시 정부의 6자회담 구도는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부정하는 반정립(反定立)인 것이다.

부시 정부의 의도와는 대립적으로, '핵문제'를 조·미 정치회담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확고한 생각이다.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4년 5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조·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 총리 고이즈미에게 "6자회담에서 미국과 이중창을 부르고 싶다. 목이 쉴 때까지 미국과 노래하겠다. 주변나라들은 관현악으로 반주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6. 미국에게 반전의 기회는 없다

미국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는 '핵문제' 협상에서 "시간은 우리 쪽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세계정책연구소(WPI) 선임연구원 겸 유라시아그룹 사장 아이언 브레머(Ian Bremmer)가 2004년 6월 19일 워싱턴의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진행한 전화대담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시 정부의 대북(조선)정책은 실패했다."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에서 미국에게 반전(反轉)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가하는 압박공세에 반발하는 전술적 공세의 여지가 미국에게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한(조선)민족의 공세를 능가할만한 전략적 공세의 여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은, 정세발전의 불가역성의 법칙에 따라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승리라는 반전시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두 가지 근거에서 그렇게 생각된다.

첫째,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 개시되던 초기에 클린턴 정부는 '핵문제'를 가지고 전쟁도발위협과 봉쇄조치강화 같은 험악한 압박공세를 퍼부었으나, 북(조선)은 굴하지 않고 강한 반격을 가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북(조선)은 동력자원난과 식량난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최대의 시련기에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대미압박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98년 8월 31일에 백두산 1호라는 이름의 3단계 추진 로켓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능력을 입증함으로써 클린턴 정부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로써 북(조선)은 '핵문제'를 둘러싼 대결에서 승리의 기선을 잡은 것이다.

부시 정부가 들어서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에 장애를 조성하였으나, 그것은 미국에게 반전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며 단지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핵문제'를 해결해 가는 정상속도를 조금 늦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에서 미국은 클린턴 정부시기에 이미 기가 꺾였으므로, 그 뒤에 등장한 부시 정부는 '핵문제'를 가지고 전쟁도발위협이나 봉쇄조치강화 같은 극단적인 압박공세를 감히 밀고 나오지 못하였다. 부시 정부가 취한 대북(조선)공세란, 기껏해야 '악의 축'이라는 비난을 늘어놓으면서 조·미 정치회담을 기피하는 것이었다. 조·미 정치회담에 끌려나왔던 클린턴 정부와 달리, 부시 정부가 '선 핵포기'와 '보상 불가'라는 억지를 부린 것은, 양자회담을 거부하고 6자회담을 추진하면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지연술책이었다.

그러나 양자회담을 거부하고 6자회담을 추진하면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부시 정부의 지연술책도 효력이 정지되었다. 부시 정부의 지연술책에 대해서는 남(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모두 반대하였으며, 심지어 미국 내부에서도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둘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침략전쟁, 군사점령, 자원약탈을 자행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이 알려지자, 남(한국) 사회에서는 미국의 오만과 횡포를 비판하는 대미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20대와 30대 연령층에서는 반미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남(한국)의 진보적 민중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개척한 반미자주화운동에 함께 나서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중심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반미자주화운동을 정치세력화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한·미 동맹체제가 앞으로 유지될지 실로 우려된다고 실토할 만큼, 정세는 변화·발전하고 있다. 지난 시기 클린턴 정부가 북(조선)이 백두산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것을 목격하고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면, 오늘 부시 정부는 남(한국)의 진보적 민중이 반미자주화운동에 나서는 것을 목격하면서 초조와 불안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정치정세의 변화는, 올해 미국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변동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가하는 압박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머지 않은 장래에 패퇴할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의 패퇴는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의 정치적 요구대로 주한미군 철군을 수반한다.

7.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략과 주한미군 철군문제

주한미군 전면철군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세기적 대결이 결속되는 것을 뜻한다. 주한미군 전면철군은 그 대결의 결속과정에서 미국이 전략적으로 패퇴하는 것을 뜻한다. 주한미군 전면철군은 한(조선)민족과의 대결에서 패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조치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한(조선)민족과의 대결에서 패하여 주한미군 철군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 아시아·태평양전략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문제를 논하려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략의 변동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백하게도, 주한미군은 열전(hot war)과 냉전(cold war)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1950년대에 수립되어 지난 50년 동안 유지되어온 낡은 전략에 따라 배치된 군대다. 여기서 말하는 열전과 냉전은 다음의 네 가지 논거를 가진다.

첫째, 열전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세력 대 제국주의세력의 군사대결을 뜻하는 개념이다. 사회주의세력 대 제국주의세력의 군사대결은 아시아대륙의 한(조선)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어났던 두 차례의 전면전인 한국(조선)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군사대결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세력을 대표한 북(조선), 중국, 베트남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

둘째, 냉전은 유럽에서 있었던 사회주의진영 대 자본주의진영의 군사적 대치를 뜻하는 개념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결집한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과 미국을 중심으로 결집한 서유럽 자본주의나라들 사이에서는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와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냉전이 장기화되었다.

셋째,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피를 흘린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진영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세력이었다. 1950년부터 1953년의 한국(조선)전쟁에서 시작하여 1961년부터 1962년의 미국의 쿠바침공과 쿠바위기, 그리고 1961년부터 1975년의 베트남전쟁을 거쳐 1989년 12월에 열린 몰타정상회담(Malta Summit)에서 레이건(Ronald W. Reagan)과 고르바초프(Mihail Gorvachov)가 냉전종식을 선포하기까지 세계정치사를 변화시켜온 것은 유럽의 냉전이 아니라 아시아의 열전이었다.

넷째, 사회주의세력 대 제국주의세력의 열전과 사회주의진영 대 자본주의진영의 냉전은 서로 무관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상호영향을 주면서 진행되었다.

미국이 남(한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해온 법적 근거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나 미국이 남(한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해온 물리적 수단인 주한미군은 1950년대 열전의 산물이다. 조·미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유지해온 법적 근거인 정전협정도 역시 1950년대 열전의 산물이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열전·냉전시기에 수립하고 추진하였던 아시아·태평양전략을 열전·냉전시기 이후의 정세변화에 맞게 뜯어고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윤곽을 살펴보면, 열전·냉전시기 이후에 수립되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략은 열전·냉전시기의 전략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새로운 전략의 기본방향은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을 증강하여 아시아·태평양에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함으로써 태평양 중심의 세계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전략은 다음과 같은 양태로 추진된다.

첫째, 아시아·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한 미국은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들을 배치한 일본열도와 괌(Guam)을 거점으로 새로운 전략을 추진한다. 그에 따라 미국은 신속기동군을 배치하고 미·일 동맹군의 장거리 작전능력을 증강한다.   

둘째, 일본열도와 괌에 산재한 미군기지들을 새로운 전략의 요구에 맞게 통폐합하여 더 강력한 아시아·태평양 전략거점을 구축하는 한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주한미군기지들을 괌의 미군기지와 주일미군기지에 부속된 전술거점으로 개편·감축한다. 그에 따라 주한미군 지상군은 철군하고, 오산기지와 평택항을 신속기동군의 전술거점으로 개조·확장한다. 오산·평택기지는 북(조선)과 중국의 미사일 공격권 안에 있으므로 그 기지를 동아시아 미군의 전략거점으로 구축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오산·평택기지가 없어도 괌과 일본열도의 미군기지에 거점을 두고 아시아·태평양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태평양전략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열전·냉전시기 이후의 아시아·태평양전략은 묘하게도 열전·냉전시기 이전의 아시아·태평양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미국 합동민사위원회(Joint Civil Affairs Committee)와 미군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가 1947년에 작성한 문서들에 담긴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합동민사위원회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는 거의 없다. 극동에서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은 미국에게 군사적 부담이 될 것이다. 적대행위가 개시되기 이전에 주한미군을 근본적으로 보강하지 않는다면 주한미군은 지탱할 수 없지만, 그러한 보강조치는 군사적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한편, 합동참모본부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공군과 해군에 의해 그 승패가 결정될 것이므로 주한미군 지상군은 불필요하다. 주한미군 4만5천명은 막대한 유지비를 요구한다. 소련이 일본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로 한(조선)반도에서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을 다른 곳에 배치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미군이 지금 자발적으로 철군하지 않고 갑자기 철군할 경우,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실추될 것이다."

그러한 아시아·태평양전략에 따라, 미국은 1949년 5월 28일부터 주한미군 철군을 서둘렀고 6월 29일에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 뒤로는 미군장교 약 500명이 주한미군사고문단(Military Advisory Group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잔류하면서 대남(한국) 지배체제를 유지하였다.

지난 시기 중국의 정치적 압력에 밀린 미국이 대만에 주둔시켰던 미군을 전면적으로 철군하였던 것처럼, 오늘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으로부터 압박공세를 받고 있는 미국도 머지 않은 장래에 자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한미군을 철군할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에게는 주한미군 철군과 철군 이후의 정세에 대처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2004년 7월 13일 작성)

* 이 글은 서울에 있는 21세기코리아연구소(www.21corea.org)가 펴낸 평론중심의 영화전문월간지 『Corea』 2004년 8월 창간특집호에 기고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