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방안 논의와 통일 경로 전망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가. 통일 방안에 관한 논의

지금까지 통일 방안 논의 과정에서는 남(한국)과 북(조선)에 있는 다양한 사회·정치 세력들이 각기 다른 견해와 주장을 내놓음으로써 몇가지 중요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통일 방안에 관한 복잡한 논의들을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향에서 쟁점 구도를 형성해왔음을 알 수 있다.

① 통일 국가의 결합 형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② 통일 국가의 체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③ 통일 실현을 위한 선결 조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쟁점 구도 안에서 진행되어오고 있는 통일 논의를 각각 통일 국가 형태론, 통일 국가 체제론으로 구분하여 각 방안들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타당성과 현실적 정합성을 검토하기로 한다. 통일 실현의 선결 조건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면 제약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룬다.

(1) 통일 국가 형태론

먼저 통일 국가 형태론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갈래로 집약된다. 하나는 국가 연합을 수립하여 조국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또는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며, 다른 하나는 연방 국가를 수립하여 조국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또는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는 남(한국) 당국이 내놓은 통일 방안이며, 후자는 북(조선) 당국이 내놓은 통일 방안이다. 당국 차원이 아닌 민간 운동 차원에서 보자면 남(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회·정치 세력들은 국가 연합 수립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연방 국가 수립론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크게 나누어진다. 해외 동포 사회의 통일운동 세력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통일 논의도 이러한 양대 범위에 각각 포괄되어 있다.

남(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국가 연합 수립론과 연방 국가 수립론을 구미 학계가 오래전에 논의한 바있는 지역 통합론의 담론 체계에서 이해·설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통일 국가 형태론에 관한 논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른바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연방주의(federalism)라는 서구적 지역 통합론의 양대 개념을 우리 민족의 통일 방안론에 여과없이 대입·적용함으로써 생겨난 인식의 혼란은 이 양대 개념을 마치 상호 배타적인 것처럼 상정하고 불필요한 쟁점 구도를 형성하려는 일련의 논의로 이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통일 국가 형태론 뿐아니라, 통일 국가 체제론도 활발하게 제기·논의되면서 통일 논의 구도가 더욱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복잡화 과정을 통해서 국가 연합 수립론과 연방 국가 수립론의 쟁점 구도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더욱 세분화된 방안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통일 방안 논의를 진전시키면서 얻은 이론적 성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통일 국가 형태론의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국가 연합 수립론과 연방 국가 수립론의 쟁점 구도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 논의에서 핵심 부분은 통일 국가의 국가 권력 결합 방식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통일 국가의 국가 권력 결합 방식을 복수 국가 동맹형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단일 주권 국가형으로 할 것이냐가 쟁점이 된다. 남(한국) 당국이 제시한 통일 방안인 국가 연합 수립론은 남북 관계를 복수 국가의 동맹 관계로 전환하자는 논리로서,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지향하는 방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국가 연합 단계에 이르면 이른바 '반국가 단체'라고 규정해온 북(조선)을 국가적 정통성이 있는 '대한민국'에서 분리·독립시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신생국'으로 승인해 주겠다는 논리다. 국가 연합 단계의 남북 관계는 조국 통일을 포기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조선)이 최근에 언급하고 있는 이른바 "련방제 방식으로 수립하는 민족 통일 국가"(또는 "련방 국가 창립 방안")라는 담론이나, 남(한국)과 해외의 진보적 통일운동 세력이 '새로운 형식으로' 주장하고 있는 통일 방안인 연방 국가 수립론은 남북 관계를 단일 주권 국가형으로 전환하자는 점에서 그 기본 구도는 연방 국가 수립론의 범주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방안은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를 지향하는 방안이다.

통일 국가 수립을 복수 국가 동맹형으로 하지 말고(또는 해서는 안되고), 단일 주권 국가형으로 하자(또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순전히 논리적인 구상만은 아니며 적어도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경험이란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을 뜻한다. 현재 남(한국)과 북(조선)은 1991년 9월 유엔에 동시 가입을 실현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는 불행히도 별개의 주권 국가로 법적 지위를 각각 인정받았으며, 이로써 국제법적으로는 두 개의 국가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냉전·분단 질서의 해체 방향이 통일 지향적이 아니라, 분단 고착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분단 고착성은 지금도 의연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유엔 동시 가입 이후 국제 사회에서 남북의 법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도, 그리고 남북 기본합의서까지 채택했는데도, 정작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서로를 실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냉전적 적대 관계에 놓여있다. 남(한국)은 북(조선)이 '대한민국'에 대해 내란을 일으켜 한(조선)반도 북부 지역을 불법적으로 장기 점거하고 있는 '반국가 단체'(국제법상으로는 교전 단체 또는 반란 단체)라고 규정한 것을 아직도 폐기하지 않고 있다. 물론 북(조선)도 남(한국)을 국가적 실체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냉전적인 적대 관계는 한(조선)반도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냉전·분단 질서의 변동 추세로 본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새로운 탈냉전적 남북 관계(남북의 평화 공존 상태)로 전환·정립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탈냉전적 평화 공존 상태의 형성과는 별도로 이 상태가 과연 통일 지향적이 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영구 분단 지향적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결정은 통일 실현을 지향하는 정치 역량이 탈냉전적 영구 분단(평화 공존적 영구 분단)을 지향하는 정치 역량을 압도할 때 비로소 탈냉전적 평화 공존 상태는 통일 실현의 기회로 전환될 것이다. 지난 시기 동서독 관계가 비적대적, 평화 공존적 교류·협력 관계로 형성된 뒤에, 강한 서독은 흡수 병합을, 약한 동독은 분단 합법화를 각각 추구해 오다가 결국 흡수 병합으로 결속되고 말았지만, 한(조선)반도에서처럼 남북 관계가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는 냉전 질서를 벗어났다고 해도 통일 실현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탈냉전적 분단 질서가 무한정 연장될 위험이 더욱 높다고 볼 수 있다.

현 시기 통일 정세를 파악할 때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이미 이러한 평화 공존 단계의 분단 질서가 영구화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 시기 내내 영구 분단을 지향해온 반통일적 정치 역량은 국제법상 이미 별개의 국가로 인정받은 남북 관계를 이제 다시 민족 내부로 옮겨놓아 남북이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방향, 곧 2개 국가의 특수 동맹 관계(국가 연합)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몰아감으로써 불안정한 정전 상태를 안정된 평화 상태로 바꾸기는 하지만, 결국 완전한 분단 국가로 갈라서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정치 역량은 독일의 흡수 병합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소련·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있을 때, 독일형의 흡수 병합이 한(조선)반도에서도 가능하다고 내다보고 이를 모방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때 구상한 적도 있었으나, 조·미 제네바 합의 이후 한(조선)반도에서는 그러한 흡수 병합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희박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최근에는 새로운 형식의 통일 포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북(조선) 붕괴 임박설'을 전파하고 있다. 통일의 한 주체요, 통일의 대상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장해온 북(조선)이 만일 내부 붕괴의 운명에 빠졌다고 한다면, 대중들의 귀에는 국가 연합이니 연방 국가니 하는 통일 방안론 따위는 넋나간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더우기 북(조선) 붕괴가 몰고올 엄청난 혼란과 불안정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하는 집단적 불안감, 북(조선)이 그대로 앉아서 파국을 맞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이는 건 아닐까 하는 전쟁 공포심,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안정된 평화 공존 단계의 분단 질서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통일 기피의 사회 심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북(조선) 붕괴 임박설은 결국 탈냉전 시기에 남(한국)의 대중 사회에서 겨우 싹트기 시작한 통일 의지를 꺾고 민중의 통일 염원에 찬 물을 끼얹어 보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해석할 수 없을까? 남(조선) 사회에 널리 파급되고 있는 북(조선) 붕괴임박설의 '심리전 공세' 앞에서 통일 실현을 지향해온 남(한국)과 해외의 통일운동 세력들은 좀처럼 대응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2) 통일 국가 체제론

지금까지 남(한국)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 국가 체제론을 정리한다면, 아래와 같이 대개 세 가지 틀로 묶여진다.

① 통일 국가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또는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통합 방안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북(조선)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흡수 병합론에 서있는 남(한국) 당국과 집권 세력의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 논리는 상이하고 대립적인 남북의 현 체제가 동질화·단일화되기 전에는 통일 국가를 수립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 남(한국) 당국의 통일 방안인 '3단계 통일 방안'은 국가 연합 수립론과 자본주의적 통합 방안('완전 통일'단계)을 서로 결속시킨 방안이다. 국가 연합 단계는 자본주의적 통합을 위한 사전 준비 단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북(조선)을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기 전에는 국가 연합 단계(복수 국가 동맹 관계)가 무한정으로 연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② 통일 국가의 체제가 남(한국)의 현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한 '새로운 체제'이어야 한다는 민중적 통일론

통일 국가 수립 문제를 비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서 해석하려는 체제 중심적 관점이다. 소련·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기 이전인 1980년대 후반의 남(한국) 민족민주운동 세력 내부에 이러한 관점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소련·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이러한 관점은 크게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란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 과정은 아니며, 남(한국)의 민중 세력이 주도하는 민중적 통일로 이룩하게 될 '새로운 체제'라고 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의 사회주의 국가 역량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른바 '대남 적화 통일론'과 구별된다. 그런데 민중적 통일론은 과연 남(한국)의 민중 세력이 통일 정세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중적 통일론은 남(한국)의 현존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 진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새로운 체제'가 현존 사회주의 체제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보수·우파들로부터 사회주의적 통합을 꿈꾸는 급진 세력이라는 비난, 더 나아가서 적화 통일론의 수정판이라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또한 민중적 통일론을 주장하는 세력은 남북의 적대적인 두 체제가 한 국가 안에 통합될 수 없다(1국가 1체제론)고 보기 때문에 '연방제 통일 불가론'에 기울어져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만일 연방제가 실현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연방제가 수립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결국 남(한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적 흡수 병합 단계로 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연방제 통일 방안을 비판·거부하고 있다. (연방제 통일 반대론)

그런데 정작 사회주의 체제로 현존하고 있는 북(조선) 당국은 통일 국가의 체제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하겠다. 북(조선)에서 지난 1980년대에 일관되게 주장해온 이른바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설 방안'은 통일 국가 형태론의 관점에서 나온 방안이지 통일 국가 체제론에 결부되어 있는 방안은 아니다. 이 창설 방안의 일부인 '10대 시정 방침'(또는 '통일 국가의 10대 정강')을 보면, 국가 활동의 자주성 견지, 민주주의의 실시, 민족 경제의 자립적 발전, 그리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 대중과 전체 인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며 그들의 복리를 계통적으로 증진시켜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체제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북(조선)의 연방제 통일론은 남북의 현 체제를 당분간 그대로 두자는 '잠정적 유지론'에서 출발하여, 체제 통합은 궁극적으로 실현되어야 하겠지만 연방 국가 수립 이후 체제 통합까지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는 '기간 설정 불가지론'을 거쳐, 체제 통합 문제는 다음 세대에게 넘기자는 '차세대 선택론'으로 변화·발전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설 방안'이 나온 뒤로 체제 단일화론(1국가 1체제론)을 흡수 병합론으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하고 있으며, 그 대안으로 '차세대 선택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같이 연방 국가 수립론이 통일 국가의 체제 설정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 까닭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합의한 바있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통일 국가 수립의 원칙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통일 국가의 체제에 관한 논의가 남북 대결과 무력 충돌을 불러올 위험성이 있는 체제 통합론(흡수 병합론)으로 귀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조선)은 비록 통일 국가의 체제 설정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남(한국)의 정치 지형이 '비자주적, 비민주적인' 성격으로 남아있어서는 연방제 통일로 나아갈 수 없고, '자주적 민주 정권'으로 변화·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자주적 민주 정권'이라는 개념은 통일 국가의 체제 문제를 설정하는 개념은 아니며, 통일을 지향하는 정권의 성격 문제를 해명해 주는 개념이다. 자주적 민주 정권이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수립되는 정권이기는 하나, 대외적 자주권을 확보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일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확립된 '안정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수립되는 정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③ 남(한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가 모두 자기 혁신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사회 성격으로 변화되면서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수렴 통합 방안

이 주장은 남(한국)의 현존 자본주의 체제와 북(조선)의 현존 사회주의 체제를 모두 비판·부정하는 양비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만일 이 두 체제가 자기 변화 과정을 거쳐 서로 닮은꼴로 바뀌어가게 된다면, 체제의 이질성, 대립성은 그만큼 완화·해소될 것이며, 따라서 통일 실현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본다. 수렴 통합 방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은 남(한국)의 현존 자본주의 체제는 북구형 사회 민주주의, 또는 독일형 사회적 시장 경제(이른바 복지 국가형)로 변화·발전되는 경로를 상정하고 있으며, 북(조선)의 현존 사회주의 체제는 유고형 노동자 자주 관리제로 변화되는 경로를 상정하고 있다. 수렴 통합론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북의 현존 체제들이 모두 북구형 사회 민주주의나 독일형 사회적 시장 경제로 수렴하는 방안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것은 북구형 사회 민주주의나 독일형 사회적 시장 경제가 과연 통일 국가의 완성된 체제로 받아들일만한 것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북구형 사회 민주주의나 독일형 사회적 시장 경제는 유럽 자본주의 체제의 '변종'으로서 현재 내부 모순으로 발전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고형 노동자 자주 관리 제도 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변종'으로서 이미 실패로 판명난지 오랜 낡은 실험으로 끝났다는 역사적 사실도 문제가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남북 당국에게 각각 자신들의 현존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의사와 능력이 있느냐, 또는 남(한국)과 북(조선)의 사회 내부에 각각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현존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는가(혹은 형성될 전망적 가능성이 있는가)하는 물음도 제기될 수 있는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국가 체제가 내부 붕괴나 외부 압력 때문에 체제를 바꾼 사례는 있어도, 자기 혁신을 통하여 국가 체제의 기본 성격을 전환한 사례는 없다. 따라서 수렴 통합 방안은 현실성 없는 방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3) 통일 국가 수립 과정을 해명하려는 논의

기존의 통일 방안 논의는 통일 국가에 이르는 과정(통일 국가 수립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통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떠한 통합 단계를 밟아가야 하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 검토 1 > 통일 국가 수립 과정에 관련한 논의들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연방 국가를 수립하는 것보다 국가 연합을 수립하는 것이 상대적인 의미에서 어려움이 적을 수 있고, 따라서 현실적 가능성이 더 높다는 논리적 전제를 깔고 있는 논리도 있다. 국가 연합 수립 과정은 교류·협력 단계(비정치적 단계)를 거쳐서 도달할 수 있는 비교적 무난한 과정이라고 예상하는데 비해서, 연방 국가 수립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정치·군사적 통합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이해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연방 국가 수립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연방 국가 수립 이전의 단계 설정 문제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연방 국가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하는 방도 설정 문제에 대하여 연방 국가 수립론이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 국가 수립론은 '민족적 대단결'과 '평화 보장 체계 수립'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연방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단계론을 포괄하고 있다. 국가 연합 수립론에서는 비정치적이고 비군사적인 교류·협력 단계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연방 국가 수립론에서는 정치적 발전 단계인 '전민족적 대단결'과 군사적 발전 단계인 '평화 보장 체계 수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민족 대단결의 단계란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천명된 남북 당국 사이의 화해 단계(정치적 비적대화의 단계)며, 동시에 연방 국가 수립을 추진할 민족 자주 역량의 형성·강화 단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평화 보장 체계 수립 단계란 비정상적이고 불안정한 현존 정전 상태를 정상적이고 안정된 평화 상태로 바꾸는 단계인데, 북(조선)의 견해에 의하면, 이 단계에는 조·미 잠정 협정 체결 및 조·미 상호 안보 협의체 구성, 평화 협정 체결, 남북 군비 축소, 주한미군 감군 및 철수 등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비정치적, 비군사적 단계 설정이 정치·군사적 단계 설정을 의도적으로 기피·회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며, 또한 교류·협력 단계를 거친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 연합을 수립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교류·협력 단계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설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단계를 거치면서 남북 사이에 현존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를 국가 관계로 전환시킬 위험을 막을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류·협력 단계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국가 연합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또한 전민족적 대단결과 평화 보장 체계 수립의 단계에서 교류·협력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촉진된다고 볼 수 있다. 정치·군사적 문제가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해결되는 과정에서 비정치적, 비군사적 문제들도 함께 해결되어갈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 검토 2 > 그 다음으로는 연방 국가 수립론이 단일 주권 국가형의 연방 국가를 수립하자는 논리이므로, 연방 국가의 실체를 고도의 국가 통합력을 지닌 단일 주권 국가, 높은 수준의 결합력을 지닌 단일 주권 국가로만 규정하는 고정 관념에 묶여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방 국가 수립론은 단번에 완성된 형태의 연방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라, 낮은 단계에서 출발한 연방 국가 초기 단계(이른바 '느슨한 연방제'실현 단계)를 거쳐서 차츰 공고한 연방 국가로 완성해나간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교해보자면, 느슨하게 결합된 연방 국가 초기 단계와 국가 연합 단계의 국가 통합 수준(물론 국가 주권의 소재 문제에서 보면, 전자와 후자가 복수 국가형 대 단일 국가형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은 동일한 수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까닭은 느슨하게 결합된 연방 국가 초기 단계에서도 국가 연합 단계와 마찬가지로 국가 정책의 기본을 이루는 외교, 국방, 입법, 사법권을 지역 정부에 더 많이 주는 단계(위의 권한들을 연방 정부보다 지역 정부가 더 많이 행사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국가 연합 수립론은 특수 동맹 관계를 맺은 두 국가가 외교, 국방, 입법, 사법권을 행사하는 상위 주체가 되며, 연방 국가 수립론은 한 국가 안의 두 지역 정부가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는 하위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연방 국가 수립론은 국가 권력의 집행자인 정부를 국가적 실체에서 분리해내어, 국가적 실체는 통합된 단일 국가 형태로 수립하되 국가 권력의 집행자인 정부는 두 지역으로 분리된 형태로 수립하자는 논리다. 여기서 핵심 문제는 통합된 실체를 국가로 보느냐 정부로 보느냐 하는 근본 차이인 것이다.

(4) 통일 국가 형태론과 통일 국가 체제론의 접속 방안

현재 남(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통일 국가 형태론과 통일 국가 체제론을 접속한 논의들은 대개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국가연합 수립론과 연방국가 수립론의 접속 방안 (두 개의 통일 국가 형태론의 접속 방안)

공화국 연합 단계를 거쳐서 공화국 연방 단계로 나아가는 경로를 제시한 김대중의 통일 방안이 여기에 속한다.

② 국가연합(또는 연방국가) 수립론과 수렴 통합론의 접속 방안 (통일 국가 형태론과 통일 국가 체제론의 접속 방안)

이 논리에서는 수렴 통합이 통일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가 국가 연합이 되건 연방 국가가 되건 상관 없이 수렴 통합으로 발전될 것이다(또는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③ 국가 연합 수립론과 자본주의적 통합론의 접속 방안 (통일 국가 형태론과 통일 국가 체제론의 접속 방안)

남(한국) 당국의 3단계 통일 방안(화해·협력→남북 연합→완전 통일)이 여기에 속한다. 김대중의 3단계 통일 방안(공화국 연합→공화국 연방→완전 통일)도 통일 국가 형태론의 관점에서는 국가 연합 수립론과 연방 국가 수립의 접속 방안이지만, 통일 국가 체제론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자본주의적 통합 방안을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 통일 경로에 대한 전망

조국 통일의 경로는 청사진처럼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통일 경로는 결국 통일 문제에 이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정치 역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역학 관계 구도 속에서 그 시기와 방향이 결정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경로를 전망하는 데서 중요한 점은 통일 방안이 아니라 현실 정치 역량이 통일 경로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정치 역량이 자기의 정치적 견해와 이해 관계를 따라 통일 정세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따라서 당면 문제는 오늘처럼 통일 문제 해결의 장래 운명이 결정되어가는 중대한 시기에 과연 한(조선)반도의 통일 정세를 변화시키는 정치 주도력을 어느 세력이 확보하고 있느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현 시기를 통일문제 해결의 장래 운명을 가름하는 '결정적 시기'라고 판단하는 까닭은 현 시기를 한(조선)반도와 그 주위 환경에서 반세기 묵은 냉전·분단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시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냉전·분단 질서 재편기의 정치 역량 배치 구도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통일 정세의 앞길을 전망할 수 없다.

앞으로 4년 남은 21세기로 들어가면서 냉전·분단 질서의 재편 향방이 과연 통일 실현의 기회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영구 분단의 기회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도 현실 정치 역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역학 관계의 정립 방향을 따라 판가름날 것이다. 또한 위에서 논의한 바있는 통일 국가가 어떠한 형태로 수립될 것인가, 통일 국가의 체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매듭을 짓게 될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통일 정세에 관련되어 있는 정치 지형을 보면 대개 아래와 같은 4대 역량 구도로 편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① 남(한국) 당국의 정치 역량 ② 북(조선) 당국의 정치 역량 ③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추진 역량 ④ 남(한국) 및 해외 통일운동 세력의 정치 역량. 이 4대 역량들 사이에서 어느 특정 역량이, 또는 복수 역량들의 공조 체제가 압도적인 지위에서 통일 정세의 변화를 자기 방향으로 이끌어가느냐를 파악해야 한다.

< 검토 1 > 한(조선)반도의 냉전·분단 질서의 재편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는 역량은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추진 역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미국이 전진 배치한 무력을 중심으로 구축한 한·미 동맹 체제를 장악함으로써 한(조선)반도의 냉전·분단 질서를 유지·관리해오고 있는데, 앞으로 냉전·분단 질서의 재편도 결국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한·미 동맹 체제의 기본 성격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여나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조선)반도에서 냉전·분단 질서를 수립한 것도 미국이요,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질서를 유지·관리해온 주도세 력도 미국이요, 앞으로 그 질서를 변화시킬 주도 세력도 역시 미국이다.

< 검토 2 > 이에 비하여 남(한국) 당국은 한·미 동맹 체제의 기본 성격 변화 과정에서 주도력이 없으며, 미국에 대한 의존 상태에 놓여있다. 남(한국) 당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대한 정치적 의존도가 심화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것이 이미 '생체화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변동기에 정치 역량을 독자적으로 발휘하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혀 있으며, 군사적으로도 아직 '전시 피보호국'의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남(한국)에서 남(한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크게 증대된 사실을 들어서 대미 의존성을 탈피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이른바 '상대적 독자성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양적 변화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견해, 또는 양적 변화 속에 은폐되어 있는 질적 고정 불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견해로 보인다. 한·미 동맹 관계는 대등한 지위에서 결속된 동맹 관계가 아니며, 미·일 동맹 체제, 미·호 동맹 체제, 미·태국 동맹 체제와 그 기본 성격이 다르다. 현존 기본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남(한국)에서 아무리 경제력과 군사력이 양적으로 증대한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대등한 지위나 독자적인 역량은 보장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미 동맹 체제의 기본 성격을 이른바 '식민지 종속성'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 검토 3 >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한·미 동맹 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추진 역량에 맞서온 대치 역량은 북(조선)의 정치 역량이다. 한(조선)반도의 냉전·분단 질서를 뒤흔들기 시작한 이른바 '조·미 핵협상'이 타결된 이후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조·미 관계의 변화 추이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북(조선)의 정치 역량은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압박과 위협을 제치고 미국을 대화·협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이 동서 냉전 질서 해체 이후에 이른바 '위험 국가'로 손가락질하고 있는 반미 성향국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북(조선)에 대해서만 이른바 '목조르기 정책'을 일정한 수준에서 완화하면서 그대신 대화·협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이라크에 대해 걸프전 뒤에 강력한 봉쇄 조치를 연장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리비아의 화학무기 공장을 폐쇄하려고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이라든지, 쿠바에 대해 강력한 봉쇄 조치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사례 등이 현재 조·미 관계 정상화 추세와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 검토 4 >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현수준에서 가까스로 동결시킨 미국은 앞으로 유해 송환 문제, 미사일 문제, '테러 지원' 문제, '인권' 문제 같은 여러 단계를 설정해 놓고 각 단계마다 북(조선)과 밀고 당기는 외교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의 '핵압박'을 경수로 건설 합의와 제네바 합의문 채택으로 이미 일단락지은 북(조선)은 앞으로 연락사무소 상호 개설과 경제 제재 조치 완화를 이끌어내면서, 멀지 않아 조·미 장성급 판문점 회담을 성사시켜 조·미 잠정 협정 체결 및 조·미 상호 안보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 검토 5 > 북(조선)이 외부 지원이 없는 고립무원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밀고 당기는 힘겨운 접전을 벌여 끝내 초강대국을 대화·협상의 길로 이끌어나올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북(조선)이 자립적 민족 경제의 토대 위에 축성된 독자적 정치·군사 역량을 확보하고 있고 따라서 체제 유지력, 체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초강대국과 첨예한 대치 상태가 반세기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인구도 적고, 원유도 나지 않고, 자본과 기술도 부족하고, 식량 사정도 넉넉하지 못한 매우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는 북(조선)이 만일 이러한 독자 역량마저 지니지 못했다고 한다면, 소련·동구 사회주의 몰락기에 왜 함께 몰락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나, 한(조선)반도 전역에 이른바 '핵위기' 돌풍을 몰고온 미국의 압력 앞에서 어떻게 무릎을 꿇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설득력있는 답변을 달리 찾을 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는 북(조선)이 미국의 압박과 위협 앞에서 이른바 '벼랑끝 외교(brinkmanship deplomacy)'로 대응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문제는 '벼랑끝'에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반격을 가해 종국에 가서는 대결 상태를 번번히 양보와 타협으로 귀착시키는 외교 전술을 운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미국은 북(조선)을 다루기 힘든 상대, 파악하기 힘든 상대로 여기고 있다.

< 검토 6 > 한(조선)반도에서 냉전·분단 질서의 해체 과정은 결국 조·미 관계의 변동 방향을 따라서 진행될 것이다. 조국 통일의 경로는 냉전·분단 질서의 해체 과정, 평화 공존 질서의 수립 과정과 겹쳐지며, 그것은 곧 조·미 관계의 변동 방향과 일치한다. 북(조선)이 전망하고 있는 조·미 관계의 변동 방향에서 떠오른 쟁점들은 조·미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과제, 그리고 주한미군의 주둔을 일정 범위에서(또는 일정 기간동안) 용인하면서 한·미 동맹 체제의 기본 성격을 대북 적대적인 성격으로부터 동북아의 지역 안보를 지향하는 성격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평화 공존 질서 수립→연방제 통일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경제 교류·협력을 통하여 북(조선)의 자립적 민족 경제 토대를 점진적으로 침식·변질시키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질서 안으로 유도·편입하는 대북 정책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 검토 7 > 이런 구도에서 전망해보면, 앞으로 통일 정세는 현재와 같은 첨예한 냉전·분단 질서가 점진적으로 완화·해체되어갈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 통일이 실현된 상태도 아닌 분단-통일의 완충기적 중간 상태(남북 사이의 적대 관계가 일정 정도 완화된 평화 공존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이 중간 상태의 지속 기간동안 남북 당국은 체제 우위를 놓고 경쟁을 벌일 것이며, 자기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각각 자신의 통일 방안(3단계 통일 방안과 연방제 통일 방안)을 실현하려고 힘겨루기를 벌일 것이다. 냉전·분단 질서를 해체하고 평화 공존 질서를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남(한국) 당국이 경제 협력 문제를 앞세우려고 하는 까닭은 자기의 경제력이 대북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며, 북(조선) 당국이 정치 문제 해결을 앞세우는 것은 자기의 정치력이 대남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검토 8 > 지난 시기 동서독 관계가 평화 공존 상태에 오랫동안 놓여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공존 상태가 국가 연합이나 연방 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국 흡수 병합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역사적 경험에서 발견하는 것은 흡수 병합의 가능성을 예방하는 한편, 공존·공영의 원칙에 입각한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과제는 결국 민족 자주·통일운동 역량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 검토 9 > 평화 공존 상태를 넘어서 국가 연합 또는 연방 국가가 수립된 단계에 이르면, 그 단계에서 국가 연합 또는 연방 국가가 과연 어떤 형태의 통일 국가, 어떤 체제의 통일 국가를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권은 다음 세대인 북(조선)의 인민과 남(한국)의 민중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정치 역량이 제시한 통일 국가 형태를 선택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 민족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값있고 번영하는 삶을 더 많이 보장해주는 체제, 자주와 평등과 공동체적 일체감을 더 확실하게 실현한 체제를 통일 국가의 체제로 선택할 것이다.

다. 당면 문제는 무엇인가

< 검토 1 > 오늘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 과업에서 제기되는 당면 문제는 민족 동질성 확보문제와 민족 자주 역량(민족 주체 역량)의 형성 문제다. 먼저 민족 동질성 확보 문제는 남(한국)의 사회 구성원들과 북(조선)의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된 역사적 실체인 민족 동질성을 한(조선)반도의 냉전·분단 질서의 장기화·고정화 때문에, 그리고 그 냉전·분단 질서를 관리·유지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인위적으로 약화·훼손하고, 외세 의존성을 확대·심화시켜놓은 현재의 불구 상태를 극복하고 전체 민족 구성원들 속에서 민족 의식의 회복, 민족 동질성의 복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대중 사업 수행에서 제기하고 추구해야 할 문제다.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 대중이 통일 의지로 무장하고 나설 때, 비로소 민족 자주 역량은 정치 세력화의 길로 나설 수 있게 된다.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 대중과 민족 자주 역량이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결합하게 될 때 남(한국)의 통일운동은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검토 2 >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대중 사업을 조직하고 추진하는 주도 세력은 미조직된 대중(통일 염원만을 가지고 있는 불특정한 대중 사회) 자신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민족 자주 역량일 수 밖에 없으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남(한국)의 민족 자주·통일운동 세력이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민족적 운동을 이끌어갈만한 정치 역량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정치 역량은 대중 사회에서 민족 동질성의 훼손 상태를 유지하려는 냉전·분단 세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매우 불리한 조건에 처하여 있다.

< 검토 3 > 민족 자주 역량은 외세 및 외세 의존 세력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외세란 한(조선)반도의 통일 문제에 국가 이익이 걸려있는 미국을 뜻하며, 외세 의존 세력이란 남(한국)의 국가 기구 내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압도적인 지위·역량을 지니고 있는 대미 의존 세력을 뜻한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남(한국)의 국가 기구와 대중 사회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형성되어온 대미 의존성 가운데서 가장 문제의 초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정치적 대미 의존성이다. 대미 의존 세력은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방침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확대해온 냉전·분단 수혜 세력이다. 이 세력은 미국의 전략 수행의 속도와 폭을 조절하는 문제에 관련하여 때로 미국에 대해서 일시적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전략 수행 방향을 따라서 의존적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 검토 4 > 문제는 남(한국) 사회에서 민족 자주 역량이 외세 및 외세 의존 세력과 경쟁할 수 있는 정치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 또는 앞으로 지닐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남(한국)의 민족 자주 역량은 그 성장 수준이 미약하고 여러 분파·계열로 분열·분산되어 있으며, 정치 역량을 구축할만한 조직적, 이념적 기초도 약하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한국) 사회의 민족 자주 역량에게는 외세 및 외세 의존 세력의 강력한 동맹 관계가 끌고가고 있는 현 시기 통일 정세의 흐름을 역류·반전시킬만한 '지렛대'가 없다. 오히려 저들의 막강한 주도력에게 끌려가는 형편이다.

< 검토 5 > 여기서 민족 자주 역량의 정치적 대응력은 어떤 조건에서 형성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남(한국) 사회의 대미 의존성으로 불구화되어버린 민족 주체성을 정치적으로 되살리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남(한국) 민족민주운동 역량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민족 대단결이라는 원칙에서 수행해야 할 정치 과업이 된다. 민족 대단결 원칙의 구현이란 남·북·해외 3개 지역의 민족 자주 역량의 대단결이라는 전민족적 과업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특정 조직을 중심으로 인식되어 왔던 3자 연대의 정치적 의의, 그리고 8·15 행사 추진 기간을 중심으로 제기되어왔던 3자 연대의 정치적 의의를 이제는 특정 조직의 범위와 특정 기간을 넘어서 확대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제는 통일운동 내부의 지역주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국가보안법이라는 현실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한 성취되기 어렵다.

< 검토 6 >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한국) 사회에서 분열·분산되어 있는 민족 자주 역량들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단결·단합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남·북·해외에 분열·분산되어 있는 민족 자주 역량들은 어떻게 단결·단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인 상식에 드는 지적이지만, 권력 쟁탈을 목적으로 한 정상배들의 일시적 집합이 아니라면, 어느 사회에서나 진보적 정치 역량의 단결은 공동의 이념적 기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남(한국) 사회에서 대중적 통일운동이 민족 동질성에 대한 도덕 관념에 기초한 운동이라고 한다면, 민족 자주 역량의 단결과 정치 세력화는 이념에 기초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남·북·해외 3자 사이에서 전민족적 단결을 구현할 공동의 이념적 기초를 형성하는 과제다. 현 시기 민족 자주 역량의 단결과 강화에 필요한 공동의 이념 체계는 냉전·분단 질서를 유지해 왔던 외세 및 외세 의존 세력에 맞서서 민족 자주와 민족적 단결의 당면 과업을 뛰어난 차원에서 수행했던 분단 시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내야 한다. 이 역사적 경험은 김구→조봉암→장준하→문익환으로 이어지는 통일 민족주의의 발생과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통일성으로 엮어진 남·북·해외의 민족 자주 역량이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 대중적 통일운동과 결합할 때 통일 정세의 변화를 주도해 오고 있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에 대응력을 갖추게 될 것이며, 자주적 평화 통일의 실현을 촉진할 것이다. (1996년 5월 작성)